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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 Nov 11. 2021

<로라와 엄마>

-김초엽의 <로라> (웹진 비유 23호, 2019.11.)를 읽고-


엄마의 팔은 고장난 로봇 같았다. 숟가락을 잡는 간단한 동작을 할 때에도 ‘엄마는 지금 저 숟가락에 신경을 다 모으고 있구나. 그래서 땀을 흘리고 있구나.’ 하고 지켜보게 되고는 했다. 관절은 꺾이듯 굽어졌고, 근육은 발작하듯 당겨졌다. 


그런 엄마가 내 머리를 빗겨주던 순간이 기억났다. 다른 엄마들은 머리를 빗겨줄 때마다 양반다리를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한다는데, 엄마는 베게 위에 머리를 얹은 채로 똑바로 누워있으라고 했다.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건 별로였지만, 그래도 눕는 건 좋았다. 엄마가 내 머리를 붙들고 아무리 오랫동안 몸을 비틀고 용을 쓴다고 한들, 물을 묻힌 꼬리빗이 스르르륵 하고 지나가는 느낌을 따라 스르르륵 잠이 들면 되었으니까. 엄마가 머리끈을 묶으려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참에는 “아! 아!”하며 눈을 부릅뜨게 되더라도 말이다. 빗을 검어 쥔 엄마의 손이 시야를 스칠 때 마다 뒤에 앉은 엄마의 머리도 몸통도 어깨도 덩달아 흔들거렸다 굳어버렸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근육들이 딸아이를 아프게 할지도 모를 그 순간을 두려워하며 고안해 낸 엄마만의 방법이 나를 베게 위에 가만히 눕히는 것이었다. 마음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면 엄마는 더 많은 땀을 흘렸다. 


김초엽의 단편소설 <로라>의 주인공 ‘로라’도 장애인이었다. 단순히 부주의하다고 표현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자주 어딘가에 부딪혔고, 넘어졌고, 피부가 긁히곤 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자신의 오른발이나 왼발이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는지 의식하지 않아도 움직임에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는 것은, 신체기관의 위치와 움직임을 적절하게 감지하는 ‘고유수용감각’ 때문이다. 로라처럼 고유수용감각이 어긋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과 자신의 현실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모든 생활에 이질감을 겪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팔과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거나, 자신의 시각이, 청각이 존재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경우, 스스로 팔을 절단하기도 하고 스스로 맹인이 되기를 선택하기도 한다(소설 속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위와 같은 ‘신체통합정체성장애’의 사례는 실제로 존재한다). 로라는 세 번째 팔을 원했다.


<로라>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진’이다. 진은 로라의 애인이다. 팔이 하나 더 있다고 느끼는, 결국에는 제대로 적응하기도 어려운 기계 팔을 달고야 만, 로라를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진은 로라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건 미국 코네티컷이건 가리지 않고 취재를 다닌다. 그 결과 어긋난 고유수용감각을 의미하는 ‘잘못된 지도’라는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은 그들 사이에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사실만 더 또렷이 확인할 뿐이다. 진에게 로라는 불가해한 존재였다. 


“진은 도저히 로라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거짓 감각을 고칠 일이지, 기계팔을 다는 것이 어떻게 해결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진은 로라를 오랜 시간 설득했고, 새로운 클리닉을 찾아냈으며, 다른 병원에 다니며 상담을 받아보도록 권유했다.”


진이 어긋난 고유수용감각을 ‘잘못’된 지도라고 했던 것처럼, 팔이 세 개가 있는 로라라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번번이 부정되었다. 로라는 고쳐져야만 하고 치료되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진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부적을 태운 재로 만든 물을 마시면 몸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 도사의 집을 찾아 매번 먼 길을 걸어 다녔다던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안수기도’를 한다며 엄마의 머리를 붙들고 흔들고 때리고 소리를 지르던 사람의 모습도 떠올랐다. 악한 영이 떨어져나가서 정한 몸이 되게 해달라는, 뭐 그런 기도였다.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도 현장이 떠들썩하면 떠들썩할수록 엄마의 거동은 주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고, “네 몸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은 건, 네가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비난이 따라붙었다. 


교회 전도사님은 엄마를 볼 때마다 날마다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꿈에서 ‘엄마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고, 사지가 온전한 몸이 마치 천사만큼이나 아름다웠다고, 그날 이후로는 날마다 엄마를 위해 울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예수님이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엄마도 그렇게 깨끗이 낫게 해 주실 거라고 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 엄마가 다 나아있게 해 주세요.”하며 몇 번이고 훌쩍거렸던, 그 은밀한 순간들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엄마를 위한 나의 도리이고 사랑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기도가 간절해지면 간절해질수록 엄마가 ‘낫지 않은’ 현실이 점점 더 또렷하게 자각되고는 했다. 엄마의 상태는 날마다 미완이었고, 그 완성의 상태는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의 ‘결여’가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일수록, ‘나의 결핍’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너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그 여행을 다녀온 거야.”


로라를 이해하기 위해 취재를 다녀온 진에게 로라가 던진 말이 기어이 나에게로 향했다. 사실 나의 기도 역시 ‘엄마를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나를 위한’ 기도에 가까웠던 것이다. 사랑인 줄 알았던 그 모든 행동들이 결국은 상대방을 ‘지금 이대로는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매번 로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진처럼 말이다. 장애인 혐오를 자처한 폭행도 아니고, 로라를 사랑하는 동시에 이해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 어떤 고생도 자청하던 진의 자상한 권유의 말들이, 외려 로라의 존재를 ‘부정’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되었던 것처럼, 엄마를 위한다고 했던 그 수많은 기도들 역시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폭력이 되어버렸다. 재를 탄 물을 받아 마시고, 머리 숙여 안수기도를 받던 그 순간, 엄마가 정작 원했던 것은 어쩌면 ‘치료’가 아닌 ‘수용’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로라는 결국 엄마와 다른 삶을 선택한다. 결핍된 존재,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냥, 지금 여기 조금은 다른 존재, 개성을 가진 존재인 것을, 스스로 선언해버린다. 심지어 연인에게 자기의 존재를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는다. 진과 무관하게 자기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진은 진이고, 나는 나니까. 그렇게 로라는 자기 목소리를 존중해 나간다. 세 번째 팔을 다는 것으로. 


‘고유수용감각’의 ‘고유’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경계를 만들어낸다. 고유하게 감각하고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을 구별하고, ‘고유’라는 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을 온전하지 못한 존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구별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보편’이자 ‘정상’이라는 힘으로 일원화되었다. 그래서 ‘보편’과 ‘정상’이 아닌 사람들마저, ‘나’의 시선이 아닌, ‘정상’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로라의 세 번째 팔은 그런 힘에 저항하는 하나의 목소리, 자기 모습으로 있고자하는 하나의 자기 존엄으로 보인다. 심지어 세 번째 팔 때문에 몸의 균형은 자주 무너졌고, 원래 가지고 있던 팔의 기능마저 저하되는 바람에 의사가 기계팔을 떼어내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까지 했는데도 로라는 세 번째 팔을 가진 채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진에게는 스스로 결함을 갖는 결정으로 보였겠지만 로라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진의 애정이나 이해를 갈구하기는커녕, 로라가 본인의 욕구에 집중하고 충실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로라의 모습이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었다. 로라가 소설 속 가공의 인물이었던 반면,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았던 엄마가 타인의 욕구에 끊임없이 본인을 끼워 맞추는 삶을 살았다는 점을 굳이 기억해내는 순간, 서글픈 마음이 두 배로 커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진이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세 번째 팔을 늘 포옹에 동참시키는 로라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정상’과 ‘보편’의 시선이 더 이상 네 편을 들지 않을 어느 날, 너도 나처럼 세 번째 팔을 자신있게 선택할 수 있겠느냐고. 내가 알아듣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말을 거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누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것이냐고.




---- 2021년 8월 2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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