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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 Nov 11. 2021

<궁금해서 벌인 일들>

아무래도 내가 엄마한테서 태어난 것은,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이면 어떨까 궁금해서 내가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엄마나 아빠를 고를 수가 있다면, 나는 정말로 또 다시 우리 엄마나 아빠를 골랐을 것 같다.


나는 호기심이 많다. 내 친구 성림이와 그토록 가까워진 것도 알고보면 호기심 때문이다(성림이가 궁금하신 분은 https://brunch.co.kr/@overeye77/18 클릭). 1980년대 대구 동성로. 내가 살던 동네는 주택가를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짓고 빌딩을 높이 올리느라, 길목마다 공사현장에서 내놓은 파란색 비닐 호스가 누워서 지하수를 뱉어내기 바빴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곳으로 몰려가 소꿉놀이 통에 그 물을 받아다가 모래알로 밥도 짓고 설거지도 하기 일쑤였는데, 하루는 그곳에서 나의 정신을 온통 뺏어버린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분명히 또래인 것 같은데, 진짜로 사람이 밥을 해먹은 냄비와 그릇 같은 것들을 들고 나와서 그 물에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그 더러운 흙탕물에 밥그릇을 씻어쓴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놀래킨 것은 진짜 설거지라는 것을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아이, 바로 그 아이의 존재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고 부럽고 충격적이고 또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몇 년간 그 모습이 머리에서 당최 잊히지를 않았다. 동네를 오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될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어디로 가는지 보느라 넋을 잃고 눈빛으로 미행을 하고는 했다. 그 아이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는 그 아이 말이다. 직접 만나고 부대끼지 않고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는 그 아이의 삶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국민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그 아이, 내가 몇 년간 궁금해 마지 않던 그 아이를 학교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오 예! 


나의 두번째 호기심의 결과물은 남편이다. 고모한테서 나에게 배다른 오빠가 하나 있다는 소리를 얼핏 듣고나서는 내내 ‘6살이 많은 오빠’라는 존재에게 꽂혀버렸다. 그러다 대학교엘 입학을 했는데 동기들 중에 6살이 많은 남학생이 하나 끼여있다는 괴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샅샅이 훑었다. 내 바로 뒤 학번 사람이라고했다. 

‘나보다 6살이 많은 남자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게으른 교수들이 학번 순서대로 조를 묶어서 매번 숙제를 시키는 바람에, 6살이 많다는 그 오빠와 몇 번이고 같이 숙제를 하면서 실컷 관찰을 할 수가 있었다.


아, 그러고보면 나보다 6살이 더 많은 오빠, 그 후보군에 내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청년부 오빠들 무리가 죄다 6살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신학생 한 명이 중학교 3학년이던 나만 따로 카페로 불러서 과일쥬스를 사주었다. 안 그래도 불빛이 누리끼리하고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너 내 사모(목사 아내)할래?”하는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는 말을 던져서는 평생 내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어버렸다. 그 이후 내가 품게 된 호기심은 ‘6살이 더 많은 그 남자는 정말로 나를 여자로 느낀 것일까?’였다.


대학교 올라오고 나서 몇몇 남학생들이 나에게 접근해 오는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나보다 6살이 많은 그 동기 오빠였다. 레포트 정리를 너무 잘 한 덕분에 학점을 잘 받았다며 굳이 밥을 사겠다는 그가 자꾸만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오래도록 간직해왔던, 그리고 한번쯤은 꼭 해결해 보고 싶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6살 많은 남자가 정말 나를 여자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야호! 정신없이 답을 찾다말고 그 남자에게 마구 몰두하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 남자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은 상태였다. 그것도 둘 씩이나. 덕분에 여러가지 호기심이 한꺼번에 충족된 느낌이었다.


세번째 호기심의 결과물은 그룹홈이다. 나는 엄마가 없었던 엄마의 어린시절이 늘 궁금했다. 몇 번이고 죽음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겨야 했을만큼 큰 병을 숱하게 앓았던 엄마가 내내 하던 말은, 내가 너를 나처럼 엄마 없이 자라게 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나는 엄마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젊고 건강하고, 심지어 전교 누구 엄마보다도 미인인 고모가 당장 나에게 엄마를 해주겠다고 달려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엄마가 내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버린 것만 같은 짐작이 들어 온종일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죄책감과 낭패감으로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없는 어린시절이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것이길래? 그러니까 엄마가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이길래? 그 질문이 성림이에 대한 나의 호기심도, 아빠가 엄마랑 결혼을 하면서 고아원에 보냈다던 배다른 오빠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시켜버렸다. 더 나아가 그 질문은 나를 지금 이 그룹홈에 있게 만들었다. 나 말고는 누구도 이력서조차 내지 않았다던 그룹홈 보육사 자리. 나도 왠지 거절을 하고 가지 않아야 할 것만 같았는데, 왠지 너무 초라하고 별로일 것 같은 직업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그룹홈에서 이모 소리를 들으며 월급을 받고 있었다.


뿌리가 확 뽑힐만큼 만족할만큼의 대답을 얻은 질문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질문을 따라다녔던 시간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거다.




----- 2021년 9월 2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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