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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allypark Sep 04. 2022

작은여름집

프롤로그: 이름이 아직 없던 집


여름이었다. 무더위가 한창이었던, 7월의 마지막 주말에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아직은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친구의 집으로 가던 날이었다. 그전에 딱 두 번 친구의 집을 간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가을이었고 다른 한 번은 겨울이었다. 가을과 겨울의 친구 집을 갔던 날들 모두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다정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집이 사람이라면 첫인상부터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으리라. 덴마크의 '휘게'와 스웨덴의 '라곰'이라는 단어들이 떠오르는 집이었다. 두 단어 모두 적당함, 아늑함, 따뜻함, 다정함을 뜻하니, 이 집은 정말로 코지 한 집이었다. 대학생 때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을 살았을 때 이웃나라 덴마크도 자주 갔었는데, 한국의 작은 스웨덴과 덴마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여름의 첫 수박

울의 친구 집 모습이 종종 눈앞에 아른거릴 때가 있었는데, 지난여름에 처음으로 다른 계절의 친구 집을 가 본 것이다. 대신 이번에는 손님으로서의 집들이가 아닌, 내가 여름부터 앞으로 살게 될 집을 보러 가는 세입자의 마음으로 들어섰다. 7월의 끝자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름의 첫 수박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 들르기 전 친구와 함께 마트에 들러 장을 한바탕 보고 내친김에 수박 한 통까지 샀다. 이 수박을 내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 집의 5층까지 들고 걸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수박을 썰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기다리면서 앞으로 나의 방이 될 친구의 '작업실 방'을 둘러보고 어떻게 집을 새로 단장할지 머리를 맞대어 한참을 고민했다. 


에어컨이 거실에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 거실의 테이블을 한 편으로 밀어 두고 바닥에 매트와 이불을 깐 채 나는 바닥에서 친구는 소파에서 잤다. 이때는 몰랐지, 이사 후 나의 새 토퍼 배송이 지연될 때까지 이렇게 거실에서 몇 주를 같이 잘 줄은. 나는 외동이라서 항상 형제가 있는 가족을 부러워했는데, 거실에서 친구와 몇 주를 같이 자니깐 자매가 새로 생긴 기분이었다. 친구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아서 언니이기도 하기 때문에 진짜 언니가 새로 생긴 것 같았다. 한동안 거실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름밤을 같이 잤고, 때로는 책을 읽다가 때로는 수다를 떨다가 둘 중 한 명이 잠들어버리고는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친구의 커피 메이커로 커피도 내려 마시고, 냉장고에 넣어둔 남은 수박을 꺼내 먹고, 둘 다 인센스를 좋아해서 인센스도 하나 키고, 친구의 LP 플레이어로 노래도 들으면서 친구 집에 있던 책들 중에 하나를 골라 읽었다. 친구는 이연 작가님의 팬인데, 덕분에 작가님의 신작 매일을 헤엄치는 법이 집에 있어서 읽었다. 나는 24살, 조금 늦은 나이에 수영을 처음 배웠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수영 강습을 등록하고 매일 아침 수영을 하러 다녔던 시절이 떠올라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는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 아침 7시 수영 반을 3개월 동안 다니면서 자유형, 배영, 평형, 접영까지 모두 마스터했다. 수영 3개월 후에는 아예 운전면허 학원까지 등록해서 면허를 땄다. 겨울과 봄이 지나자 나는 수영도 할 줄 알고 운전도 할 줄 아는 조금 더 '어른'이 되어있었다. 


동료에서 친구가 되기까지 


운전면허를 따고 매일 오토바이로 띵굴 아르바이트를 하러 출퇴근을 했었다. 그때 처음 동료로 만난 사람이 바로 지금의 하우스메이트이자 언니가 된 나의 친구다. 지금까지 했던 모든 아르바이트 중, 몸과 마음과 정신이 아주 세트로 힘들었던 곳. 매니저와 손님의 갑질로 하루하루 지쳐 떨어져 나갔던 시절, 한 달 만에 6킬로가 빠지고 아주 잠깐 몇 개월 일했던 곳이지만 단 한 번도 점심을 먹지 않으면서 일한 곳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 깨달았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입맛이 뚝! 떨어져 아무것도 못 먹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동료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아직도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서로가 없었으면, 동료애가 부재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동료이자 언니이자 친구인 사람, 우리는 시스터후드로 맺어졌구나. 언니는 그때도 나에게 '봄날의 햇살'이었고, 새로운 집이 필요했던 지금도 '봄날의 햇살'이 되어줬구나. 




그렇게 우리는 함께 7월의 마지막 날에 달력을 넘기고 8월을 같이 맞이했다. 이사를 정한 날 바로 전 날에도 친구 집을 한 번 더 들려서 친구의 '작업실 방'에 있던 모든 짐을 친구 방으로 옮기는 대 작업을 해냈다. 그리고 친구의 카페에서 빌린 책 적게 벌고 행복할 수 있을까 1편을 읽었다. 여전히 에어컨을 틀어둔 거실에서 함께 잠을 자며, 다음 날 이사를 앞둔 부푼 마음을 한껏 진정시키면서, 아직 여름이 한참 남은 것 같았지만 벌써 입추가 알게 모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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