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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lker Apr 03. 2023

#3. 존재 자체가 번아웃이었던 사람 (1)

왜 나는 꼭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된 것일까?

번아웃에 관련된 책이나 강의들은 모두 우리가 번아웃에 빠지게 된 이유나 번아웃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또는 이겨낸 이야기들에 대해 말한다. 눈에 드러나는 번아웃이라는 현상 이면에는 원인이 있고, 일정한 처방을 통해 번아웃을 이겨낼 수 있다는 모델을 전제로 한다. 번아웃이 최근에서야 부각된 사회심리적 질병이기에 생소해서 그렇지, 이 질병을 이해하는 방식도 다른 질병들에 대한 처방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기력과 우울감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나도 이러한 '번아웃 모델'에 근거해 무언가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나락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언제까지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얼른 다시 일어서야했다.


번아웃 모델에 나의 경우를 대입해보니,



(1) 번아웃이라는 현상이 존재한다.


전적으로 그랬다. 특히나,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도무지 의욕이 들지 않는다. 심지가 꺾인 채 끊어지지도 못하고 고개숙인 식물의 줄기처럼 마음이 계속해서 꺾여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번아웃에 대한 여러가지 정의가 있지만 미리엄-웹스터 사전의 정의에 따라 "신체적/정신적 또는 정서적 에너지가 고갈/소진되어 그 결과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좌절감에 놓여진 상태 (exhaustion of physical or emotional strength or motivation usually as a result of prolonged stress or frustration)"라고 본다면 나의 상태는 이 정의에 완전히 부합한다. 정신과에서의 검사결과도 그랬다. 나는 번아웃 모델의 1단계에 해당한다.



(2) 번아웃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있기는 한데 진짜 원인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원인을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면 그와 동시에 해결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텐데, 진정한 원인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왜 번아웃에 빠졌을까?"하고 누가 묻는다면 당장 생각나는 이유는 있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닌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유는 이것뿐이었다. 이유의 전부였다. 일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사회적 욕구 중 하나로 일을 하고 싶다는 건 건강함의 반증이지 질병의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일을 제대로 하려는 직원에게 일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것은 100% 회사의 과실이다. 회사가 나쁜거다. 


보통 회사가 일을 엄청나게 많이 시키고, 직원들은 일을 쳐내느라 바쁜 것이 보통의 회사생활인데 일을 제대로 하고 싶어서 번아웃에 빠졌다니... 누가 들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같다. 여기에는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 대한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속한 팀은 새로 만들어진 FP&A (Financial Planning & Analysis) 팀이었다. 흔히 말하는 재무기획업무가 주된 Job이었다. 새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권한은 하나도 없는데 책임은 엄청나게 많은 곳이었다. 일반적인 FP&A팀에는 전사의 손익을 관리하는 역할이 핵심인데, 지금 팀은 매년 사람을 뽑고 내보내고 뽑고 내보내고 하느라 어떤 업무를 원래의 주기에 맞게 굴려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튈 준비를 해야했었는지 모른다.) 급하게 꾸린 3명의 담당자들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알아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보라는 요구사항만이 있었다. (이 때가 마지막으로 튀어야 할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분야의 업무경험이 없는 팀장은 팀이 무슨 일을 해야할 지에 대해 무엇하나 뚜렷하게 말하는 것이 없었고 (~ 해야한다라는 주장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질책을 아랫사람들인 우리에게 100% 토스했다. 어떤 각도로 날아오는 컴플레인이든 그대로 굴절반사했다. 이 사람이 과연 팀장인가, 여러 날 동안 의심했다. 


더 웃긴 점은 매주 하는 줌(Zoom) 미팅에서 지주회사 사람들한테 탈탈 털리는데도 팀 리더가 한마디 커버를 쳐주는 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데이터를 조회할 권한은 이미 요청한지 오래였고, 의사결정체계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오자마자 했던 이야기였지만, 팀장은 끝끝내 다른 팀 사람들과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구석기시대의 전사들 마냥 나무꼬챙이와 뾰족한 돌로 맹수들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팀원들과 내가 지닌 이전 회사에서의 경력은 무용지물이었다. 연차가 평균 10년에 달하는 인원이었어도 소용이 없었다. 외국인 임원들까지 있는 줌 미팅에서 우리는 조리돌림되기 일쑤였다.   


팀장은 구경만했고, 지주회사 팀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나를 비롯한 3명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제안하는 모든 것마다 번번히 좌초되었다. 거의 4개월간 지주회사의 온갖 비위를 맞춰주며 정보와 권한을 구걸하다시피 했으나 아무런 협조도 없었다. 이러이러한 점에서 협조를 안해주면 나도 내 일을 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며 버티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보였다. 내가 그렇게 중요시하는 일을 하려고해도 도무지 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정리를 해보면 결국 나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할 수가 없게 된 현실이 문제상황인 것인데, 그러면 일을 하지 않고 적당히 눈치보며 월급만 챙겨도 되는 것은 아닐까? 많은 직장인들이 조용한 퇴사를 외치고 있는 요즘, 이런 상황은 더없이 좋은 기회일 수 있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걸까?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꼭 해야하고, 일을 통해 인정받고, 그 보상으로 돈도 버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게는 일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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