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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lker Apr 11. 2023

#4. 존재 자체가 번아웃이었던 사람 (2)

성과주의의 화신

가치Value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객관적이다. 객관적인 것으로서의 가치 중 대표적인 것은 단연 '돈'이다. 돈(화폐)는 지폐 또는 동전에 불과하여 먹거나 입을 수 없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돈을 원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돈을 가진 나는 필요로하는 무언가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돈이 가치를 갖는 이유는 내가 쥔 돈의 반대편에 늘 이 돈을 필요로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가치'라는 것은 '필요'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다. 필요의 근거는 다양하나 일단 필요하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된다. 경제적인 의미에서든, 정신적 혹은 미적인 의미에서든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가치있음을 대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라는 것은 필요라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나는 꽤 일찌감치부터 필요에 눈을 떴다. 필요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기본적인 의식주라는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 빠듯했기 때문이다.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던 아버지가 서른 무렵에 회사를 나와 사업을 시작했다가 계속해서 실패하자 유복하게만 살아오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재산이 모두 증발했다. 마침내 단독주택 마저 경매로 넘어가 말 그대로 길에 주저앉아야했을 무렵, 누나와 나는 고작 8살, 6살이었다. 천만다행으로 할머니께서 혹시 몰라 따로 챙겨놓으셨던 천만원이 있어 겨우겨우 반지하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수도 없이 다른 사람들의 돈을 빌려 사업을 했고 계속해서 실패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아버지를 찾는 채권자들의 전화가 왔었고,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늘 '모른다'고만 하라셨다. 지난주에, 지난 달에 아버지가 몇 번 왔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아버지는 늘 본 지 오래된 사람이어야 했고, 점점 그렇게 되어갔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할 수 있는 모든 단기 아르바이트부터 계약직 등을 이어가셨고, 그런 생활은 누나와 내가 취업을 하기까지 20년 이상동안이나 이어졌다. 많은 것들이 포기했음에도 삶이라는 필요를 채우기에는 가진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들이 또는 세상이 필요로하는 것을 주어야 했고 그럴 수 있어야 했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상은 어떤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의 무엇을 필요로하는 것일까?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스스로 필요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바로 '공부'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학업성취도도 낮고, 거리문화도 좋지 않기로 소문난 인천의 작은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게는 아무런 자본이 없었다. 돈은 물론,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가이드를 해줄 주변의 어른들도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그것이 얼마나 서툴고 성급하며 투박한 결론이었나 싶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역시 그 길 밖에 내게는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공부머리가 전혀 없진 않던 내게는 해볼만한 도전이었다. 


무조건 서울에 있는 최상위권 대학에 가는거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도, 이 길밖에는 답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오직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필요로하는 사람이 되는거다. 그러면 나도, 우리 가족도 필요한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쓸모를 익히고 배워야했고, 그럼으로써 가치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 자신의 가치란 그렇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배우고 익히며, 이를 통해 성과를 내는 것. 처음부터 내 인생의 번아웃은 결론일 수 밖에 없었다. 미래에 되어야 하는 나는 항상 과거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더 필요한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파우스트와의 계약과도 같았다. 머리를 빡빡 깎은 17살의 나는 장차 성과주의의 화신이 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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