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척의 배
상품기획은 재밌는 면도 있고 성취감도 있지만, 차아암 고단한 일이다. 어느 자리든 만사태평일 수 없고 화려함 뒤에 고담함과 쓸쓸함이 있듯이 상품기획도 그 고단함을 넘어 때로는 비루함에 빠지기도 한다.
기획부서는 왠지 실행보다 더 위인 거 같다면 아니 그렇게 굴려고 하면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위대한 계획을 보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수록 성적표는 초라해진다.
상품기획은 더더욱 그렇다. 상품은 컨셉만으로 승부가 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디테일이 기대에 부합되어야 한다. 컨셉은 상품기획자 혼자서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디테일을 완성하는 건 결국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과 협력 그리고 공감을 기반한 합심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이 내 맘 같으랴… 각 부서의 이해관계, 함께 하는 이들의 역량과 이 일에 대한 자세, 시간 또는 투자의 과부족 그리고 원가, 기술, 새로운 기능의 적절한 만족도 등의 실현 가능성까지, 참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드릴 때가 많다. 그리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 가듯이 하나하나를 풀어가다 보면 때때로 읍소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너무 단기간에 많이 발생하면, 내가 뭐 하려고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를 넘어 난 왜 이렇게 되는 것이 없지 내가 너무 무능한가 하면서 ‘비루함’을 느낀다.
자주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고비가 왔을 때, 이 고비를 넘어서야 상품기획으로 계속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되는 것만 한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것으로만 하고 어려운 것은 회피하게 된다. 그러면 몇 가지 개선이 되는 제품을 출시하는 이력을 쌓을 수는 있다.
그러면 조직이 서서히 도전이라는 생기를 잃어가게 된다. 새로움이라는 깃발을 들고 미래를 향해 뛰어가야 할 상품기획이 기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점점 보수화 된다. “이런 걸 제안해 봤자 우리 회사가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에 잡히고 만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상품기획자의 일이다.
당연히 기술적, 경제적, 사업적 feasiblity를 잘 살펴보면서 말이다.
히브리어로 ‘영광‘이라는 단어 ‘카보드’(kavod, כָּבוֹד)는 무거운 것이라는 뜻에서 변형이 되었다고 한다.
고대 전투복(갑옷)이 무거웠기에 전투복의 별칭처럼 쓰이다가 전쟁에서 목숨을 지키는데 중요한 물건으로 ‘중요함‘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후 병사보다는 장군과 왕이 더 좋음 무기를 가지고 있어 ‘권위‘라는 뜻으로 확장되다, ’영광’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왔을 때, 수많은 상처가 있는 전투복은 그 군인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evidence (증거)였고, 그 군인의 영광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스포츠에서 우승한 선수의 유니폼이나 훈련복 같은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상품기획자에게 주어진 환경과 난관은 출시 이후 돌아올 영광이다. 역경이 클수록 영광이 크다. 쉬운 일에 영광이 있을 수 없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백 척의 배가 있었다면 세계 해전사에서 기억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영광을 위해 오늘도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운동선수처럼, 훗날의 영광을 생각하며 언더독의 모습으로 힘을 내게 바란다.
같은 상품기획자로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