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으려고 다른 이의 초대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 나의 조각들이 보인다. 감성이 메마름이 지속될 때 의자에 앉아 찌푸리고 쥐어짜는 글은 아무 향기를 내뿜지 못한다. 이럴 땐 차라리 남의 글을 대해 본다. 다른 작가의 글과 책, 그리고 유튜브 책 읽기 동영상 등이 포함되겠다. 쓴다는 능동에 대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사실은 글을 쓰는데 절대 등한시 하지 말아야 할 진리임을, 읽으면서 확인하곤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의 진심은 남의 글을 대할 때 자신도 모르게 찾아낸다.
읽으면서, 쓰는 것에 대한 영감과 열정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낀다면, 써야 되는 내 속의 당위성은 분명한 것이다.
다른 이의 글을 대하면서, 작가의 철학, 그리고 글을 풀어가는 솜씨를 배운다. 내가 하지 못한 면 갖고 싶었던 열정이 작가의 수족관을 넘어 내 어항으로 넘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깨끗함이 내게 깨끗한 정서를 배달하고, 신선한 파동이 부패된 자리를 자극하는 것을 느낀다.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의 적정한 비율 조정은 너무도 중요하지만, 흔히 급한 마음에 자꾸 나의 것을 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졸속은 이렇게 만들어지곤 한다. 시간에 쫓겨 감동이 전혀 없이 써진 시가 그렇고, 예화에 충실하지 못한 추상적인 생각으로 장식해 수필이라고 내어놓은 작품들을 가끔 신문에서 대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글은 내 속의 물이 넘칠 때 써야 독자에게 감동 줄 것이 생긴다.
"축복의 통로"는 성경적 용어이다. 어떤 개인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물이 넘치듯 도움을 주게 될 때 종종 쓰인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어쩌면 이러한 통로로 자신이 사용되기를 하나 같이 소망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면, 자신을 글을 통해 누군가 읽고, 힘을 얻고,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것이겠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글 쓰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 스스로 접근하여 위로와 해답을 얻는 이유가 있다면, 그 글이 또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글은 쥐어짜는데서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내가 넘쳐야 한다. 넘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을 기다려 보는 것이 현명하다.
작가가 모든 직업군에서 수명이 가장 짧다는 통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스을수록, 스토리를 짜내야 하는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그 통계는 진실일 수밖에 없다. 글을 써야 하는 사람으로서 빨리 세상을 등지지 않으려면 이런 사실에 대한 전략이 있어야 한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운동과 여행으로 일상을 바꿔보는 것으로.
메마른 글을 넘기 위해 남의 글을 읽는다. 잘 쓴 글이 있고, 못 쓴 글도 있다. 무조건 읽어 보다 보면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물 컵에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이다. 나의 글을 쓰지 않던 시간이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닌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