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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Oct 07. 2023

[보충]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충무로' 〈거미집〉

http://magazine.kofic.or.kr/contents/202310/Critic/YesOrNo.do


대담에 보충할 필요가 있어서 적기 시작했지만, 무언가 적다보니 너무 어수선하다. 한 번 쭉- 긴 볼륨의 글을 쓸 필요가 있겠다. 너무 길어지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당장 필요를 느껴서!







영화에 대해 첫인상부터 이야기해보자.


 


김기영 감독의 실상과 엄청 다르다고 느꼈다. 김기영 감독은 1971년과 1972년 <화녀>와 <충녀>로 각각 그해 최고 관객을 동원했다. 김기영 감독은 극중에서처럼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이 아니었고(영화에서는 김열 감독이 신상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편집자), 조감독 경험 없이 데뷔해 평단의 주목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또 <거미집>에는 이만희 감독 작품, 예를 들면 <마의 계단>에 대한 오마주가 있어 김기영 뿐 아니라 여러 한국 고전 영화에 대한 재미가 보이지만, 그것들이 역사성 없이 키치하게 붙여져 있다. <거미집>은 김지운이라는 90년대 시네필이 본 김기영이란 생각이 든다.


〈거미집〉의 김열은 김기영인가? 에 대해 영화사 연구자로서 재빨리 말할 책임을 느꼈다. 마침 그날 김기영 유족이 인격권 훼손을 근거로 〈거미집〉에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걸었고, 제작사 측에서는 주인공 김열이 김기영이 아니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미집〉의 김열은 한편으로는 김기영이 아니고, 한편으로는 김기영이다. 



먼저 김기영이 아닌 이유. 〈거미집〉의 배경은 1970년대다. 그러나 유신이 언급되고 이만희가 살아있기 때문에, 현실-역사에서는 1972-1975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 김기영은 〈거미집〉의 김열처럼 초라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1974년을 기점으로 영화판의 세대교체가 가속화되지만, 1971년, 1972년 김기영은 〈화녀〉와 〈충녀〉로 각각 그해 최고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감독이었다. 삶의 경로로 미루어 볼 때, 김열은 절대 김기영이 아니다. 김기영은 미공보부(USIS)의 ‘리버티뉴스’를 제작하는 데서 시작해서 단 한 번도 조감독을 겸하지 않았으며, 1955년 〈양산도〉를 통해 상업영화로 데뷔한 직후부터 거의 한국의 대표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가령 1960년 평론가 임영(林英, 영화감독 임상수의 아버지)은 “영화감독이 많지만 이 두 사람처럼 신문잡지 기자들에게서 욕 안 먹는 사람도 드물다”며 유현목과 김기영을 거명했다. 김기영은 신상옥[영화 속의 신감독(정우성)의 모티프]의 조감독이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김기영은 신상옥을 싫어했다! (알 수 없지만, 이것이 김기영 유족이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의 계기는 아니었을까? 그토록 싫어한다고 했던 사람을 아버지의 스승처럼 묘사하다니. 심지어 아버지가 그 사람의 작품을 도용했다니!)


언급한 영화들보다 팀 버튼 감독의 <에드 우드>가 떠올랐다. 김기영 감독 자체가 90년대 컬트영화의 열풍으로 '한국의 에드 우드'와 다름없이 발굴되었다. 영화 <에드 우드> 속 에드 우드와 오손 웰즈가 만나는 장면처럼 <거미집>에 김열 감독이 신상옥(<거미집>에서는 ‘신상호’ 감독이다. -편집자) 감독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 감독은 계속 걸작을 찍지만 다른 한 사람은 우당탕탕 영화를 만들고 여러모로 <에드 우드>와 유사하다. 실제로 김기영과 신상옥은 서로를 엄청 싫어했다. 1962년작 신상옥 감독의 <열녀문>과 1963년작 김기영 감독 <고려장> 사이에 표절 시비가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이 엄청 싸우면서 1963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서로 불쾌해하는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대담에서 언급한 1963년 대종상 시상식에서의 사진이다. 굉장하지 않은가? 나는 한국영화사에서 이 사진이 제일 흥미롭다. 남한영화사의 관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진이라고도 생각한다. 


한편 김열은 김기영이 맞다. 바로 이미지. 김열은 실제 김기영의 이미지를 거의 본 따왔다. 시각에 기댄 영화에서 이미지를 본 따오고 김기영이 아니라고 하다니… 이건 핑계다. 연구자만 눈치챌 수 있는 특성도 있다. 첫 장면 김열이 그리는 콘티는 김기영의 콘티와 거의 유사하다. 집을 나설 때 아내의 눈치를 보는 장면이 잠깐 있는데, 김기영은 여러 차례 생계를 아내에게 맡기고 영화를 하는 것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콘티 같은 내밀한 요소가 있긴 하지만, 〈거미집〉의 한국영화사는 대개 키치(Kitsch)-이미지로만 있다. 여배우의 뺨을 때리는 미도는 여배우의 뺨을 때린 임권택을 상기시키고, 일본통인 여걸 제작자는 김지하의 뺨을 때린 일본통 전옥숙을 상기시킨다. 김기영과 신상옥의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측면에서 〈거미집〉의 위치는 재밌다. 〈거미집〉은 김기영의 역사적 실제를 따온 게 아니라 풍문처럼 이미지만을 가져왔다. 정성일은 ‘김기영감독 홈페이지’를 개설 인터뷰에서, 1990년대 한국의 컬트영화를 찾는 과정에서 ‘에드 우드’처럼 발견되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리고 그 바탕에 한국영화사(의 지식)의 단절이 낳은 자국 역사에 무지한 시네필이 있다고 지적했다. 

〈거미집〉의 중반부, 김열과 신감독이 만나는 장면은 〈에드 우드〉(팀 버튼)에서 에드 우드와 오슨 웰스가 만나는 장면을 오마쥬한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에드 우드와 오슨 웰즈가 만나는 장면이 주는 감격 같은 것을 관객이 느끼기는 어렵다. 에드 우드와 오슨 웰즈라는 고유명이 주는 역사적 무게가, [심지어 지금의 시네필에게도!] 김열과 신감독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상옥의 이미지를 따왔다 해서, 관객들이 우와! 신상옥하고 알 수 있을까? 느낄 수 있을까? 〈파벨만스〉에서 존 포드가 나올 때 느끼는 [유치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경탄이 불가능한 상황. 그것이 현재 이미지로서 한국영화사의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 한국영화사가 키치로 작동할 수 있는 거리를 가졌다는 점, 그것이 주목할 만하다.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영화사는 「〈하류인생〉을 둘러싼 이야기」에서 언급한 김홍준의 지적에 덧붙인 나의 해석이 정당하다. 그 지적이란 이것이다. “80년대에 미국영화 직배 반대 투쟁이, 90년대에는 스크린쿼터 수호 투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다 같이 모여서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기생충〉에 대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평가가 많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기생충〉은 시작이 아니라 하나의 끝을, 무언가 끝나는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그 해석이란 이것이다. 공동체 의식의 바탕에는 세계영화 속의 한국영화를 인준 받는 성장서사가 있었고 〈기생충〉이 성장서사의 끝(end)이다. 그러므로 그 끝이 열어주는 시계示界가 과거의 한국영화를 컴플렉스 없이!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지반을 마련한 것이다. K영화의 시작에서 방화-한국영화 그리고 그에 내재한 갈등과 콤플렉스는 '콘텐츠'라는 이름 앞에서 이제 무화된다... 〈헤어질 결심〉이 〈안개〉(김수용, 1967)를 소환하고, 넷플릭스가 〈애마부인〉을 소환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거미집>의 영화 속 영화 구조는 어떻게 보았나. 카메라는 한대 돌아가지만 흑백으로 찍힌 마스트 쇼트, 클로즈업 쇼트 등이 매끈하게 편집돼 있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관객의 머릿속에서는 환상적으로 두 영화가 편집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동의하지만 영화 속 영화가 지금 영화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김열 감독이 영화를 바꾸기 전 원안 속에서 민자가 목을 매달고 죽은 장면, 그 장면만 옛날 영화처럼 잘 찍혔다고 느껴져 엄청 좋았다.

 


나는 〈거미집〉을 보고 김지운이 참 고루하다고 생각했다. 대담 당시에 〈스파이의 아내〉를 언급했는데, 〈스파이의 아내〉에는 유사쿠가 아내 사토코와 동생 후미오를 배우로 촬영한 단편영화가 나온다. 그 단편영화가 내러티브에서 하는 기능도 근사하지만, 1차적으로 그 단편영화에서는 어떤 기쁨이 느껴진다. 21세기의 감독이 3-40년대의 영화를 모방하는 기쁨. 먹물을 좀 묻혀 말하자면 ‘자기의 타자화’ 그리고 〈스파이의 아내〉와 그 단편영화 사이의 양식적 차이가 오묘한 긴장을 만든다. 〈거미집〉에는 이것이 없다. 〈거미집〉의 김열이 촬영한 영화는 그냥 이전의 김지운이 촬영한 영화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는 앞서 말한 90년대 시네필(김지운이 정확히 이 시대에 속한다)의 한국영화사에 대한 내밀한 열망의 부재에 기인하겠지만, ‘자기의 타자화’가 예술사에서 양식의 발견을 주도하곤 했던 점을 떠올리면 굉장히 아쉽기도 하다. 잠깐, 김열이 영화를 뜯어고치기 전 배경처럼 지나가는 “민자가 목을 매달고 죽은 장면” 아래의 장면이 〈거미집〉 전체의 베스트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조용한 가족><반칙왕>에서 선보인 김지운 감독 특유의 코미디, 김지용 촬영감독의 유려한 화면, 고전적인 냄새를 풍기는 모그 음악감독의 음악 중에서 <거미집>에서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 혹은 아쉬운 지점이 있었나.


촬영의 경우, 마지막 플랑세캉스 신을 촬영을 하는 방식이 아쉬웠다. 김열 감독의 촬영 현장이 허술한 건 전제돼있으니까 그를 원테이크로 찍으면서 기교를 보여줄 줄 알았는데 컷이 계속 나뉘었다. 그래서 막상 엔딩에서의 롱테이크는 큰 감흥이 없었다.


이 아쉬움 역시 같은 맥락이다. 〈거미집〉의 김열은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열광하면서 영화를 찍지만 김지운은 그런 열광을 전해주지 못한다. 영화 내내 말해오던 “플랑세캉스 신”을 촬영하는 장면은 그 촬영 장면 자체가 “플랑세캉스 신”으로 찍혔어야 했다. “플랑세캉스 신”의 어려움은 촬영 현장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정작 그 “플랑세캉스 신”으로 찍은 장면을 보여줘도 아무 감흥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여기서 김지운에 대해 참… 여러모로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애처로웠고.


 



한편 옮겨지지 않아서 가장 아쉬운 말이다. 나는 〈거미집〉이 이만희의 영화라 생각한다. 이만희가 가장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지운은 스스로를 이만희의 적자라 생각해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의 오마쥬이고, 〈밀정〉에는 이만희의 무드가 흐른다. 그리고 [나만 밀고 있지만] 〈인랑〉은 〈암살자〉(이만희, 1969)를 다시 찍은 게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거미집〉에서 오직 이만희만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김기영과 신상옥은 김열과 신석호로 키치-이미지화 할 수 있지만, 김지운에게 이만희는 그것이 불가능한 감독이다. 이만희가 전화 통해 풍문처럼만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김지운은 이만희 때문에 한국영화사에 끌리지만, 픽션화하기에 이만희는 김지운에게 너무 가깝다. 이름만 나오던 이만희가 〈거미집〉에 불쑥! 등장해야 했다면? 아마 〈거미집〉은 무척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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