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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Nov 28. 2022

나는 정서적 상류층과 운동한다.


내가 운동을 좋아하게 된 3가지 이유

참나 오래 살다 보니 또 별일이 있다.

내가 운동하러 가는 걸 좋아하게 됐다.

그것도 천하에 재미없는 러닝 머신 뛰는 걸 말이다.

이 기이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3가지로 요약된다.



1. 화장은 지우는 게 더 중요하다.


인생에서 큰 수술을 했다.

수술하면서 좋았던 건, 공식적으로 '2달 동안 운동 금지'였다.

'배에 구멍 3군데를 뚫었다는데 그게 아무는 시간이 그렇게 짧다니...'

너무 짧아 아쉬웠다. 하지 말라고 하면 진짜 좋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빨리 뛰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전엔 몰랐다.

두발로 걷는 건 물론이고 내가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수술을 통해 알게 됐다.

나는 내내 누렁이(=남편)에게 말했다.

"스포츠 센터 회비 아까우니까 회원권 정지시켜."

그런데 누렁이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생돈 회비를 내가며 유지시켰다.

나는 그 돈이 아까워서 샤워만 하러 가곤 했다.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져 힘들었다.

두 달 만에 처음 운동을 하면서 깨달았다.

'나란 인간은 땀 흘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할 때 젤 행복한 인간이구나!'

어쩌면 이걸 알려주기 위해 신이 내게 수술 같은 거창한 사건을 투척한 게 아닐까?

운동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다.

뭐지? 화장을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하듯이 말이다.

그때 깨우쳤다.

나는 바보였다! 어떤 바보? 매일 운동 가는 바보!

그동안 내가 힘들었던 건 매일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면 안 된다. 그냥 계속하는 게 더 중요하다.

운동하지 않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내 루틴을 다시 정했다.

하루 운동하고 하루는 쉰다.

이 별것 아닌 루틴을 정하고 나니 갈까 말까 고민 없이 그냥 가게 됐다.

그렇게 나는 격일로 운동가는 사람이 됐다.

그것도 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2. 우는 것도, 웃는 것도. 러닝머신 위에서


포틀랜드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온다.

그래서 야외 산책이 어렵다.

산책은커녕 빨리 어두워져 집에서 나오기도 싫다.

작년을 떠올려 보면 매일매일 운동 가기 싫은 나 자신과 전쟁이었다.


하루키의 책 <달리기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을 보면

같은 시간에 달리러 나오는 이름도 모르는 어떤 누군가가 있다.

보기만 해도 힘이 나는 요상한 존재, 그래 그게 중요한 거였다.

같은 장소에서 땀을 흘린다는 내적 친밀감,

서로의 존재가 무언의 응원이 된다.

어느 날 러닝머신을 뛰다가 내 앞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책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냥 운동만 하는 게 아니었다.

‘아, 책 보는 김에 다리 운동도 하는 거구나’

나도 다음번엔 무언가를 같이 해봤다.

처음 내 러닝 송이 된 건 서태지와 BTS 콜라보 콘서트였다.

노래를 따라 하며 뛰다 보니 30분이 너무 빨리 갔다.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콘서트에 있는 느낌이었다.

비 오듯 땀이 나고 온몸이 젖었다.

그때부터 보고 싶은 브이로그나 드라마는 아껴뒀다가 운동할 때 같이 봤다.

넷플릭스 드라마 <첫사랑>에 나오는 우타다 히카루 노래 들으며 울기도 했다.

그날의 내 감정 기분에 따라 보고 싶은 걸 틀어 놓고 나는 그저 뛰었다.

그렇게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모든 게 러닝머신 위에서 가능해졌다.


3. 죽는 것도 러닝머신 위에서


아니 울고 웃는 거 말고 죽을 뻔도 했다.

뛰다가 운동화 끈이 풀렸다. 만약 넘어졌다면 죽을 뻔했다.

그 와중에도 오늘의 기록을 망치기 싫었나 보다.

러닝 머신을 중지시키는 대신 다리를 크게 벌려 끝까지 걷는 나란 인간이라니.

다 뛰고 나면 숫자로 기록이 나온다.

매일 결과를 기록해 두는 재미에 신이 났다.

그걸 사진으로 찍어 누렁이에게 보냈다.

나의 루틴을 공유하고 나니 뿌듯함이 더 커졌다.

이제는 굳이 사진으로 찍어 두지 않아도 공유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그 누구에게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내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2마일을 30분 정도 뛰거나 걷는다.

숨이 차면 걷고 걷다가 다시 속도를 올리는 걸 반복한다.

매일 A4 종이 한 장을 쌓아 나가는 기분이다.

지금은 티가 안 나지만 쌓였을 때 커다란 결과가 될 그 시간을 기다린다.

예전엔 그 시간까지 안달이 났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성실한 시간을 보냈다는 증명, 내 몸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걸로 됐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스포츠 센터에 다닌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게 된 이유, 가장 중요한 0번이 있다.

이건 맨 앞에 쓰지 않고 뒤에 쓴다.

최고의 스포츠 센터로 다닌다.

처음엔 가성비 좋은 24 아워스 체인점으로 다녔다.

그래서였나? 한 달에 한번 갔었다.

두 번째로 조금 더 비싼 곳은 집이랑 가깝지만 더 좋은 곳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센터로 등록했다.

여긴 호텔식 흰 수건도 주고 시설도 최신식이다.

그래서 운동을 떠나 그 장소에 가는 것 자체를 좋아하게 됐다.

사우나할 때나 운동할 때나 책 읽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 가장 좋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으로 찍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 거 같아 눈에 담아 두었다.

그런 풍경들이 내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고 있는 사람보다 손에 책이 들려있는 사람들이 섹시하다.

그 사람들의 재정 상태는 모르겠지만 분명 정서적 상류층이다.

그 모습에 둘러싸여 운동한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름답고 그 감각이 나를 생글거리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만약 다음에 이사를 간다면 고급 스포츠 클럽 근처로 가고 싶다.

예전엔 내 수준에 가당치도 않는 명품백을 사거나 물건 같은 걸로 사치를 부리곤 했다.

지금은 가랑이가 찢어지더라도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스포츠 클럽에 다니고 싶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남산 하얏트 호텔 스포츠 센터에 등록하고 싶다.

한국에 있는 동안 우린 거기서 장기 투숙을 했다.

사우나를 하는 동안 내가 내 자신을 최고로 서포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린 노느라 바빴지만 동생 부부는 늘 지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운동을 즐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들은 뭔가 인생의 묘미를 제대로 아는 것 같다.

가장 최고의 곳에서 땀 흘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싶다.

그것이 최근 업데이트된 나의 인생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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