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인잡>에 도른자
1도 버릴 게 없어!
외국에 살지만 진짜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다.
아빠가 “손흥미니는 똥도 버릴 게 없다.”며 덕질을 하는데 나야 말로다.
알쓸 시리즈는 1분 1초도 버릴 게 없다.
버릴 게 없어서 편집은 얼마나 힘들까?
괴로우면서도 행복할 것 같다.
시청자들이 온전히 전달받는 건 빙산의 일각이다.
비하인드 스토리와 현장에서 받는 생생한 에너지, 그건 돈으로 살 수도 없다.
오직 선택받은 소수들, 보는 내내 그 팀 방송국 놈들이 부러웠다.
그럴 때 스르르 '아,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고야 마는...
나는 방송작가를 그만 둔 결혼 이민 2년 차다.
그 테이블에 껴서 이야기하고 싶고
(감히 나 같은 보통의 인간은 티키타카가 안될 정도로 그들의 지식은 방대하고 깊고
통찰력은 무한대이지만)
모든 대화를 다 받아 적어 나만의 노트로 만들고 싶다.
이 프로의 매력은 전혀 엉뚱하고 거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아주 작고 개인적인 내 인생에 와닿는다는 것이다.
인생은 모호하니까 터닝포인트가 필요해
새로 시작한 <알쓸인잡>,
역시나 토크를 하다 보면 삼천포로 빠지고 전혀 새로운 질문이 던져진다.
다윈의 진화론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궁금증이 나와 버렸다.
"왜 다른 가수가 아닌 BTS의 노래가 전 세계로 퍼졌을까?"
당사자인 RM은 그 이유를 공연할 때 팬과 서로 소통하는 진정성을 꼽았는데
결론이 더 기가 막히다.
그건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고 논리적 이유를 댈 수 조차 없는 모호함이다.
RM은 그런 모호한 현상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 미묘함, 나도 그 아름다운 세계를 사랑한다.
결국 인생은 비논리적이고 모호하게 흐르기 때문에
인간은 자꾸 터닝포인트와 같은 편집점을 만들고
의미를 확인하는 게 아닐까?
회귀본능점을 뚫고 나가다
심채경 천문학자는 중학교를 모르는 동네로 배정받은 순간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했다.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두려움과 동시에 설렘의 뒤범벅.
그전까지는 너무 뻔한 인생이었다고 한다.
특히 동성의 형제가 있으면 옷이며 가방이며 물려받고 너무 예측 가능한 인생을 산다고 했다.
예측 불가능함, 나는 어쩌면 그런 것들에 설레고 끌렸던 것 같다.
타인의 터닝포인트를 들으며 나는 동시에 내 임계점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나도 큰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너무 뻔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
고작 시청률에 희로애락이 걸린 인생,
고작 동료 작가들보다 조금 더 벌고 싶어 안달 난 인생.
고작 그런 것 들에 의미를 두고 살아왔던가?
왜 모든 말 앞에 '고작'이 붙어 버리는 걸까?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드럽게 시시하네
우물안 개구리는 도무지 바다의 일을 상상해 보지도 못하며 살았다.
이민자에게는 회귀본능이라는 게 있다.
길면 3년까지 지속되는데 어떤 핑계나 이유를 대서 다시 돌아가려는 거다.
이건 내가 만든 말이다.
나는 심채경 학자의 저 말을 듣고 회귀본능점을 뚫어버렸다.
그 지점을 넘으면 쓸데없는 걸로 과거를 그리워하고,
홈 시크라며 들어 눕고, 완벽한 한식을 차려먹으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
불편함을 두려움을 감수하고 더 많은 위기에 나를 노출시키고
더 큰 바다를 상상한다.
결혼 진화론, 그 증거 수집 중
비혼이 힙하고 결혼이 구린 시대다.
과연 그럴까?
그게 맞다면 임경선 작가나 김이나 작사가가 결혼을 했을 리 없잖아!
그런데 그 말이 얼추 맞으니까 나는 한쪽 구석에서 결혼이 구린 게 아니란 증거를 모으는 것 같다.
어제는 진라면을 먹고 입에 착착 붙어 깜짝 놀랐다.
그동안 신라면만 먹고살았고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누렁이(=남편)가 사다 놓은 진라면 때문에 나는 42년 만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맛은 진라면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신라면과 함께한 잃어버린 42년, 지금부터라도 바로 잡자!
이 사소한 작은 발견도 내가 결혼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갖다 붙이는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다윈의 진화론에서 자연스레 살아남을 종들이 걸러지듯
결혼생활이라는 것도 앞으로 시대와 맞지 않는 구닥다리 관습은 사라진다.
자연스레 인생을 더 재밌게 만드는 요소만 남을 것이다.
"여기 증거와 예시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윈이 그렇게 진화론을 썼듯이
나 역시 그 증거와 예시들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그 영감은 신사임당에게서 얻었다.
신사임당은 나처럼 방송국 놈들이었는데 지금은 100억대 자산가가 되었다.
물론 천명 대일 때부터 그의 유튜브를 구독했기에
그의 성장과정이나 티핑포인트에 도달한 시점도 함께 했다.
그런데 그가 몸소 느끼는 이 결과의 시작점이 뭐였는지 궁금했다.
그는 그 시작이 결혼이었다고 한다.
혼자 살 땐 전혀 몰랐던 감정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와이프가 전셋집을 꾸며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그 모습,
그때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인터뷰를 보면서 나도 결심했다.
나도 혼자 살 때는 몰랐던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둘이니까 더 재밌는 일을 벌여 보자!
내가 10년 뒤에 쓸 책 제목을 정했다.
<자연을 사랑한 속물들! 100억을 만들다>
이것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모호한 인생의 편집점이 되어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유퀴즈>에 나가고 싶어 한다.
나는 아니다. <알쓸인잡>에 나가고 싶다.
<유퀴즈>에 나가서 하는 말은 뻔하지만
<알쓸인잡>은 어떤 이야기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설렘이 있다.
심채경학자가 모르는 동네로 중학교 배정을 받은 그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