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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Dec 14. 2022

아빠의 아빠가 되었다.


엄마가 반대해서 못했던 걸 아빠는 시작했다.

이제 눈치 볼 엄마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위험해서였다.

그거 타다가 죽으면 어떡해?

나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 하다가 죽으면 그게 행복 아닌가?

아빠는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을 목표로 비행학교에 다닌다.


요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하다 죽을 것인가가 내 화두다.

나는 좋아하는 걸 하다가 죽고 싶다.

그런데 예능작가를 하다 죽을 순 없다.

(아니 웬만해선 그거 하다 죽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아이돌처럼 수명이 짧기 때문에 큐시트를 그리다가 혹은 촬영하다 죽을 일은 거의 없다.

아이돌이 연기자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듯

예능작가들도 드라마를 쓰거나 제2의 직업을 찾아 나선다.

실력은 물론이고 운까지 받쳐준다면 드라마 작가로 데뷔를 하는 것 같다.

나처럼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운 탓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쭈구리가 되는 사람도 많다.

확실한 건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찰리 브라운의 만화가처럼 죽고 나서 다음날 마지막 회가 실리는 그런 죽음을 동경한다.

병원에서 죽는다면 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내 작품에 몰두하고 싶다.


아빠는 늘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에 두고 살았다.

무협지에 빠졌을 땐 사과박스 단위로 책을 사들여 집안이 온통 책으로 미어터졌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처음 보는 낚싯대 가방이 떡하니 거실에 있었다.

그건 골프채라는 거였고 그 길로 아빠는 아마추어 골프선수가 되었다.

드럼을 시작했고 얼마 안 돼 선생님이 길 건너다 하늘로 가는 허망함을 경험하고는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게 다 어른이 되어 시작한 것들이고 어릴 때는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매해 태풍이 와서 농사가 엉망이 되는 대도

똑같이 그걸 당해내야 하는 첩첩산중 시골생활이 미웠다고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운명이 싫었다고 한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렸기에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학비를 못 내서 선생님에게 불려 간 그 상처가 아직도 자기를 짖 누른다고 했다.

어린 시절 상처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한 인간에 각인되어 인생을 지배해 버린다.

누구나 상처는 있지만

그 상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 상처를 가지고 점점 작아질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님 우리 아빠처럼 사골뼈처럼 우려먹고 성공에 밑거름으로 만들어 버리고야 말 것인가?


가난때문에 좋은 거 하나 못 입어 보고 못 가져봤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총각시절엔 갖고 싶은 것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 시절 첫 월급을 다 바쳐 브랜드 청바지를 산 미친놈이 우리 아빠였다.

그런 낭만을 똑 빼닮은 나도 월급을 올인해 샤넬백을 샀었다.


그런 낭만파인 우리는 영상통화를 하다가

"경비행기는 히터도 안 나온다며 안 춥나?

이번에 한국 들어갈 땐 아빠 몽클레어 잠바 사서 갈게."

꽁꽁 얼어붙은 날에도 비행을 간다기에 내가 말했다.

아빠는 그딴 건 필요 없고 보스 헤드폰을 사달라고 했다.


비행조종의 꽃이 이착륙 교신인데

그때 쓰는 헤드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써서 싫다고 했다.

요가를 할 때 자기만의 매트가 필요하듯

자기만의 헤드폰이 갖고 싶었던 거다.

그 교신 연습을 위해 아빠는 매일 아침 유튜브로 영어 공부를 한다.

한국에 사는 아빠나 미국에 사는 나나 아침 루틴은 똑같다.

칠십 넘어 영어공부라니 어제 배운 거 바로 그날 까먹고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며 계속해나가는 영어공부였다.

발음 기호가 아무리 해도 외워지지 않는 다 길래

급기야 내가 화이트보드를 사서 다 써 놓고 왔다.

만약 집에 도둑이 들어온 다면 이 집에 중학생이 살고 있는 줄 착각할 거다.

아빠는 미국 사는 나보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한다.

왠지 그 헤드폰은 내가 사줘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보스 A200이라는 게 뭔지 뒤져봤다.

헤드폰계의 에르메스란다.

해외직구를 하면 200만 원 남짓이었다.

비싸서 생색내기 좋은 선물이다.

본인이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그걸 선물 받는 것과는 다르다.

선물로 받는 건 그 꿈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까지 받는 거다.


어느 날 <탑건 2>를 보고 오더니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항로가 너무 시시해서 지루한 지금의 비행이 아니라 전투기 조종이라고 했다.

탐 크루즈가 되고 싶은 마음, 나도 안다.

그런데 아무리 꿈이 원대하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경비행기 조종이다.


그 헤드폰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아빠로부터 아무것도 받아 본 적 없는 소년에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

그렇게 아빠의 아빠가 되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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