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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umal Jun 22. 2020

설렘중독자

정신 나간 소리

고백하건대 입사 초 몇 달은 야근하는 걸 좋아했다. 좋아했다는 건 사실 좀 오버겠지만, 확실히 야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출퇴근 시간이 짧다는 점도 있지 않았나 싶다. 환승 없이 지하철역 네 정거장만 지나면 집과 회사를 오갈 수 있었다. 그러니 퇴근 시간이 늦어져도 부담이 없었다.


직장을 구할 때 출퇴근 시간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혹자는 출퇴근 시간이 길면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자기개발을 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물론 네 정거장을 오갔던 내가 '출퇴근 시간의 고통'에 대해 깊이 논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이십 대 초반에 사십 개의 정거장을 지나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자리에 앉는 대로 눈부터 감았다. 그러고는 세상모르게 잤다. 그 덕에 수업 시간에 안 잘 수 있었을까? 잤다. 덕분에 집에 가는 길에 안 잘 수 있었을까? 잤다. 하지만 정말 졸려서 잔 건 아니다. 길 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체력과 정신력이 절로 소모된다. 삶의 질은 현저하게 낮아지면서, 그렇게 시간은 길 위에 버려졌다.


수련 생활과도 같던 사십 개의 정거장을 지나 마침내 네 정거장의 길에 올랐을 때, 출퇴근 시간이 짧아진 덕에 삶의 질은 올라갔다. 오후 6시에 퇴근해서 집에 오면 6시 20분이었고, 씻고 밥을 먹으면 7시를 갓 넘겼다. 밤 12시에 잠들기 전까지 다섯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야말로 저녁이 있는 삶. 이렇게 삶의 질이 높아지자 관대한 마음이 생겼는지 야근이 두렵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집이 가까워서 야근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이제 막 사회에 나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게 좋았고, 무언가 완성되는 데 있어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설렜다. 학생일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성취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 설레는 감정이 '일하는 나'라는 존재를 더욱 부추겼다. 회사 일을 집으로 가져와 주말에도 일을 했다. 황금 같은 주말에 놀러 나가거나 침대 위에 누워 퍼질러 잠이나 잘 것이지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일을 한 것이다. 물론 모든 게 미숙했던 시기라서 불안한 마음에 일거리를 챙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일하는 나 자신에게 취해 '이렇게 열심히 하다니, 난 너무 멋져!'라고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가족들은 회사 일이 그렇게 많냐고 걱정을 했고, 그럴 때마다 약간은 지친 표정이 녹아든 미소를 살짝 지었다.


'지쳐 있지만 애써 웃어보는 프로페셔널한 나….' 


그래, 그때 나는 미쳤었다. 야근 수당이나 근무 외 수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완전히 돌아버리기 전에 스스로 지쳐버렸다는 점이다. 


어김없이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던 날이다. 금방 내리기 때문에 보통은 서서 가지만 그날은 피곤해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말 내내 일을 한 터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에게 눈길이 갔다. 대학교 과 잠바를 입은 여학생이 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퉁퉁 튕기며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 학생을 보며 문득 나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와,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생각하길, '지금은 안 힘드냐?'


힘들었다. 네 정거장밖에 가지 않으니 출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잠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잠들 수 있을 만큼 피곤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참 나약한 게 기분 하나에도 현혹되어 사리 분별을 못한다(인간이 아니라 온니 미, 저스트 미일지도)어떤 일이든 의욕이 넘치는 시기는 존재하겠지만, 사실 오래가려면 뭐든 '적당히'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하자, 적당히.



- 지금의 나: 설렘이란 게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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