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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umal Jul 02. 2020

별별 나 참 별

제발 그 마음 거둬주소서

자고로 신입이라면 사내에 울리는 전화벨 정도는 다뤄야 한다. 신입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전화 당겨 받기'일 정도로, 이는 꽤 중요한 사안이다. 덧붙여 매우 불안한 사안이기도 하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은 익숙한 일일 텐데 수화기를 든 쪽은 익숙지 않은 일이기에, 그 사실을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기에, 그들이 서로를 천천히 알아가며 발전할 사이는 아니기에. 특히나 나는 신입시절, 수화기를 드는 일이 거의 시한폭탄을 껴안는 일처럼 다가왔다. 


물론 처음부터 전화를 잘 받는 신입사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화로 배달 음식을 시킬 때에도 긴장하는 사람이다(배달앱에 감사할 따름). 게다가 그 당시 나에겐 잘못된 습관 하나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말하려면 입사 전 몸담았던 아르바이트의 세계부터 소개해야 한다. 


대학 시절 나는 주말마다 경마장에서 일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경마장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좋기로 유명한데, 그도 그럴 것이 마권 발매원은 하루에 몇 천만 원이 넘는 고액을 다뤄야 한다. 또 돈과 관련된 일인 만큼 매우 예민한 상태의 고객들을 응대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르바이트 초반에는 그런 분위기에 압도돼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단승이니 복승이니 하는 게임 룰도 헷갈리는데 받는 돈과 거스름돈까지 머리로 계산해야 하고, 그 와중에 고객들은 빨리 좀 하라고 소리를 치니 험한 말을 듣는 건 예사였다. 퇴근길에는 진이 다 빠져버려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을 지나친 적도 있고, 출근길에는 내가 탄 버스로 맞은편 차가 돌진해오는 상상까지 했다. 


하지만 인간사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듯이(방금 지어낸 말) 3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일이 손에 익고 속도가 빨라진 덕에 느리다고 욕을 먹는 일도 줄었고, 비매너 고객들을 다루는(?) 법도 익혔다. 물론 욕을 아예 안 들은 건 아니다. 욕먹는 게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한번은 지하철역에서 술 취한 아저씨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나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는데, 나는 욕에도, 동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모르는 아저씨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욕을 한다? 주말마다 겪고 있는 일이지 않나.

 

이후 경륜장으로 이직해 아르바이트 생활을 2년 정도 더 했다. 일은 달라졌지만 화가 나 있는 고객들을 응대한다는 점은 같았던 터라 어느새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는 곧 입사 후 수화기 너머의 고객으로부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하게 응대하는 습관으로 발현됐다. 고객을 향한 강한 응대는 우리나라에서 금기시되어 있다. 경마장이나 경륜장 등의 거친 세계에서도 표면상으로는 금지된 부분이다. '고객은 왕이다.' 이 말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잡히기만 해 봐라 진짜.

 

어쨌든 나의 강한 응대는 다시 시간이라는 마법을 통해 나아질 수 있었다. '보통의 세계'에 적응을 해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강하게 응대하지 못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게 됐을 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날은 독자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책을 샀는데 공부하듯이 읽느라 밑줄을 쳤다, 근데 밑줄 친 게 싫으니 새 책으로 바꿔 달라. 두꺼비가 된 기분이었다.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에는 책을 구매할 때 꽤 값이 나가는 사은품을 증정하는 이벤트가 자주 있었다. 그러한 이벤트와 관련한 독자들의 전화도 많이 받았는데, 선착순 증정이라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는 물건이 없느냐, 꼭 갖고 싶었던 건데 어떻게 안 되겠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강한 응대'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보니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설득했다. 이 정도 말했으니 그 마음 제발 거둬주소서.


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나도 있었다. 희한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 된다는 양 행동하고 있는 내가. 그것이 신입의 자세인지, 호구 같은 내 모습일 뿐인지, 아님 '고객은 왕'이라고 가르쳐온 사회의 탓인지.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세상에는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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