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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umal May 27. 2020

나의 처음

첫 출근

생생하다 말하고 싶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바로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당에. 그럼에도 기억을 짜내고 짜내본다. 나의 첫 출근.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원래 걱정이 있을 때는 잠이 안 오지 않나. 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 때가 몇 번 있는데, 대학 수시 시험을 보러 가기 전날(망하면 어떡하지?), 대학교 OT 가기 전날(아싸 되면 어떡하지?), 홀로 유럽 여행을 가기 전날(국제 미아 되면 어떡하지?), 그리고 첫 출근 전날.


어떡하지?


대학교 졸업 후 곧장 취직을 했다. 자랑은 아니다. 자랑할 거리라면 좀 더 대놓고 할 거다. 당시 나는 아무런 준비가 안되어 있었단 걸 말하려 한다. 봉사활동이나 토익 점수는 졸업에 필요한 수준만 맞췄고 인턴 등의 사회 경험도 전무했으며, 한 거라고는 아르바이트와 그저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이력서에 빈 공간이 많아서 쑥스러웠고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을 때도 걱정부터 앞섰다.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자신감도 없었다. 그래서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청심환을 사 먹었다. 약발에 기대보는 수밖에.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평소의 나답지 않게 잘도 나불댔다(부채표다). 어찌 됐든 운 좋게 취직을 하긴 했는데, 사회에 나갈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만큼 어수룩했다.


첫 출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외국인 한 명을 만났다. 나는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곧잘 붙잡히는 편이다. 길을 물어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인상이 참 좋으셔요."라고 말하며 다가오는 이들이 더 많다. 다행히 그 외국인은 길을 물어온 쪽이었고, 휴대폰을 사려는데 어디서 사야 하냐고 물어왔다. 왜 휴대폰이 사고 싶은지 묻고 싶었으나 외국인만 보면 얼어붙는 입은 당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10여 년의 영어 교육은 그가 원하는 걸 알아듣게 해주어 휴대폰 매장 앞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벌써 취업을 했다고?"


앞서 말했듯이 나는 자랑할 거리는 대놓고 말하는 편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얼마 전 졸업한 사실을 자랑하니 앞으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얼마 전 취업을 했다고 말하자 그는 매우 놀라워했다. 20대 후반이었던 그는 유럽과 중국, 일본 등에서 몇 년씩 살다가 그해부터 한국의 K대 어학원을 다닐 예정이라고 했다(그 역시 자랑꾼이었다). 그는 전날 막 한국에 입국한 상황이었고, 휴대폰을 사기 위해 무작정 종로에 온 참이었다(전자기기를 사고 싶다고 하니 구글은 세운상가를 알려준 모양이다).


"내가 취업을 하는 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일 거야."


그는 자신이 서른 이후에나 취업을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서른이면 너무 늦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생각한다. '스물넷은 너무 일렀어.'


경험이나 내면적으로 성숙의 시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정해놓은 규율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 대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이라는,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정해져 있다. 그 고스톱 판에서 10여 년을 놀아나던 내가, 한순간 밑장 빼기를 선보이거나 판을 뒤집을 수야 없었다. 그저 순리이겠거니 취업은 했는데 첫 출근을 앞두고는 극심한 불안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늘 그랬듯 놀아나야 했지만 내가 가진 패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대망의 첫 출근 날.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의 테이블에 모여 앉아 아침부터 케이크를 잘랐다. 신입사원 환영식이 이렇게 거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마케팅팀 팀장님 생일이었다. 점심때까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웠는지 모르겠다. 점심식사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입이 짧은 편인데 최선을 다해 먹었던 기억은 난다. 어른들은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지 않나. 첫 출근부터 어른들(그래봤자 내 나이 또래 선배들이었다)에게 책잡히기 싫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선 딱히 맡은 일이 없으니 책을 읽었다(나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어느 순간 회사에 온 건지 도서관에 온 건지 혼동이 되었다.


일의 세계에서 '처음'은 꽤 중요한 것 같다. 처음으로 몸담은 업계가 그다음 이직처와 때로는 미래까지 결정짓곤 한다. 나 역시 우연히 내디딘 첫발로 인해 수렁으로 아, 아니 계속 같은 업계에 몸 담그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불안에 떨었던 첫 출근에 대한 기억은 이것이 전부다. 걱정한 것에 비해 아무 일도 없었고 내 인생을 뒤흔들 만한 중요한 사건도 없었다. 처음이란 늘 서툴고 어색하고 당황스러움 속에서 벌어지므로 오히려 잊기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대표님에게 듣길, 첫 출근 당시 나는 매우 화나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긴장을 하면 죽상이 된다는 걸 알았다. 첫 출근부터 죽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니. 어쩌면 당시 나는 긴장을 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내다본 것일지도. 그렇게 쭉 죽상으로 이어질 앞날을 예견한 것은 아닐까.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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