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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쓴 글

원소윤, <꽤 낙천적인 아이>

이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다

by 황의현

『꽤 낙천적인 아이』

원소윤, 민음사, 2025


내가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분당 웃음 횟수가 낮으며 농담의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다시 말해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원소윤, 『꽤 낙천적인 아이』11쪽.


삶과 세상을 향한 신랄한 농담

나는 신랄한 웃음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요즘 자신을 만든 책 10권을 뽑는 것이 (일부 집단에서) 유행하고 있는데, 나를 만든 책 10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산문(대표적으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도 비슷한 색깔을 띤다. 세상을 향한 신랄한 농담이 가득한 글이다.


히치하이커나 에코의 글 정도는 아니지만, 원소윤의 『꽤 낙천적인 아이』도 자못 신랄하게 농담하는, 그러나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닌 이야기다. 농담은 일상의 우스꽝스럽고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향한다. 버젓이 사람이 사는데 어째서 고시원이 사람이 살 곳이 아니냐고 묻고 신을 그렇게 찾는 사회에서 어째서 발광하는 빨간 십자가가 그렇게 많으냐고 묻는다. 웃음은 약자를 해하지 않으면서 도발적이고 과감하다. 기독교의 시작이 평범한 시골 여자의 말에 귀 기울여 준 페미니즘이었다고 주장하고, 석가모니를 향해서는 당신이 덧없다고 한 인생을 매일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모든 농담이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읽은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지금도 낄낄거리게 만드는 장면들도 있다. ("바나나 초콜릿! 바나나 초콜릿!") 자못 의미심장해 보이는 문장("'아름다움'의 어원이 '앓은 다음'임을 아시는지요?")도 사실 굉장히 사소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다.


이 책은 어떤 큰 줄거리를 따라 전개되는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다. 외할아버지 치릴로(외할아버지를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세례명 '치릴로'로 친구 부르듯이 부르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이 소설이 평범한 글과는 궤를 달리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와의 추억에서부터 시작된 책은 글쓴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대학 시절 이야기와 부모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등등이 왔다 갔다 하며 흘러간다. 마치 예전 개그콘서트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단막극으로 구성되었듯, 이 책도 여러 우스꽝스러운 일화와 농담을 엮은 이야기집 같다. 그래도 큰 주제는 글쓴이 개인의 생애니,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큰 줄거리를 생각하지 않고, 앞뒤 이야기의 관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세계관을 공유하는 여러 단편 모음을 읽듯이 읽어가는 책이다. 사실 삶이야말로 농담의 원천이고, 삶이 하나의 큰 줄거리에 따라 흘러가지 않으니, 삶을 묘사하기에는 단편 모음이 가장 적절한 기법일 수도 있겠다.


생각 없이 웃자, 농담은 힘이 없으니

흔히 농담으로 고통을 승화한다고 한다. 웃음에는 고통과 슬픔을 달래는 힘이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정작 농담을 업으로 삼는 코미디언이기도 한 원소윤은 이렇게 외친다. 세상의 고통은 아무리 농담해도 가벼워지지 않는다고, 농담이 고통에 어떻게 영향을 주겠냐고(254쪽). 시종일관 꽤 낙천적이고 능글맞던 어조는 글 가장 마지막의 오픈마이크에서 상당히 신랄하게 바뀌며 웃음과 농담에 어떤 쓸모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항변한다.


원소윤이 책을 열 때 이미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통과 아픔이 가득한 삶이 어찌 그리 쉽게 농담이 되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측량할 수 없는 크기의 큰 고통(35쪽)을 견뎌 내며 살아간다. 이야기가 자못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글쓴이가 우스꽝스럽게 말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고통을 적절하게 다룰 줄 아는 성숙한 화자한테만 귀를 기울여"(254쪽) 주기 때문이다. 울부짖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농담은 절망한 자의 마지막 수단이자 발악이요 외침이다.


문제는 말하는 사람이 웃으며 말하니 듣는 사람도 웃어넘기곤 한다는 것이다. '저렇게 고통을 웃음으로 잘 승화한 걸 보니 다 이겨냈구나 하하하' 하면서. 그 사람이 왜 그런 농담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어떤 이별과 아픔을 겪었는지 농담 뒤에 숨긴 마음과 사정을 들여다보려고 하지는 않은 채.


그래서 원소윤은 농담과 웃음에 어떤 기능을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냥 다 포기하고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두는" 방식을 택한다(254쪽). 웃음을 약자가 절규할 마지막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세상을 견뎌 낼 원천으로 남겨 두려고 한다. 농담은 힘이 없다. 그러니 농담이 무언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고, 그냥 웃길 때 마음껏 웃자. 원소윤은 자신의 삶을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듣게 하려면 자신의 삶을 농담처럼 그려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농담으로 승화해 버릴 수 없는, 농담으로 가벼워질 수 없는 현실이기에. 부모님이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사는, 고시원을 전전해야 하는, 육체 노동자인 아버지가 출근할 때마다 퇴근해서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사랑한 사람을 영영 떠나보냈는데 달랠 방법은 찾지 못한, 여자라는 이유로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욕을 들어야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러니 누군가 웃을 때 함께 웃자. 그가 또 언제 웃을지 모르니. 그러나 웃음으로 그를 판단하지는 말자. 그가 정말 웃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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