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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쓴 글

최진영, <쓰게 될 것>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쓰려는 의지

by 황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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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될 것』

최진영, 안온, 2024



쓰는 것, 쓰이지 않는 것, 쓰지 못한 것, 쓰게 될 것

쓴다는 행위는 형태가 없는 기억과 감정과 생각과 의견을 글이라는 형태가 있는 실체로 바꾸는 작업이다. 동시에 '쓰다'라는 동사는 '글을 쓰다'라는 의미 외에도 무언가를 사용한다는, 즉 무언가를 사용해 소모하거나 소진한다는 의미도 가진다. '쓰게 될 것'은 따라서 글로 쓰게 될 것 또는 사용해서 소모하고 소진할 것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씀으로써 무언가를 글로 남겨두고 무언가는 사라지게 한다. 그렇다면 쓰게 될 것은, 남길 것과 사라지게 할 것은 무엇일까.


<쓰게 될 것>의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과거가 남긴 상처와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다. 내게서 떠나갔으면 하는 것들이다. 내가 마음 쓰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다. 동시에 내게서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감정은 아무리 쓰더라도, 아무리 감각하고 인지하더라도 도저히 닳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커지고 무겁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최진영은 그것들을 '쓰게 될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최진영은 상처, 후회, 불안, 두려움을 깊숙하게 파고들어 쓴다. <쓰게 될 것>에서는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붕괴에 관해 쓴다. <유진>에서는 내면 깊이 숨어 있으면서도 부정하려고 하는 욕망, 경멸, 우월감, 불신, 자기비하, 열등감에 관해 쓴다. <ㅊㅅㄹ>에서는 다 타버려 남은 잿더미만 남은 열정과 감정에 관해 쓴다. <썸머의 마술과학>에서는 솔직함을 명분으로 옹호되는 위악과 모든 작고 사소하고 소박한 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욕망에 관해 쓴다. <인간의 쓸모>에서는 우리가 향하는 암울하고 뒤틀린 미래에 관해 쓴다. <디너코스>에서는 청년을 옥죄는 불안과 두려움에 관해 쓴다. <차고 뜨거운>에서는 행복을 바라면서도 불행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 행복을 두려워하는 차고 뜨거운 마음에 관해 쓴다. <홈 스위트 홈>에서는 죽을 운명을 쥐고 태어난 한 인간의 덧없음과 하찮음에 관해 쓴다.


그러나 최진영의 쓰는 목적은 후회와 불안과 두려움에 잠식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진영이 쓰기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쓰이지 못해 떨쳐낼 수 없던 감정을 똑바로 목도하는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절망에, 어두움에, 불안에,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다. <쓰게 될 것>의 등장인물은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에도 총을 쓰기보다 글을 쓴다. "나는 매일 밤 삶을 선택한다"(39쪽)라고, 인간의 잔혹함은 지나갔으며 또다시 반복되리라고 잘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쓴다(39쪽). 그렇게 씀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복음 5장 13~14절)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무서운 빛, 썩어가는 소금"(16쪽)이 되어 서로를 죽이는 가운데서도 서로를 돕던 사람들을, "나의 신"(39쪽)을 잊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과거를 새롭게 쓰기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은 감정을 응시하는 행위는 곧 그런 감정이 남은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런 뒤에야 현재를 종속한 과거에서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길이 열린다. <유진>에서 유진은 망각에 묻어 두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뒤에야, 그 시절을 맑게 기억할 수 있게 된 이후에야, 그 "일그러진 기억"을 대면하고 울렁거림(74쪽)을 경험한 뒤에야 과거 자신이 분위기에 휩쓸려 경멸했던 다른 유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망각의 요새 안에 틀어 박혀 안온하다고 믿었던 삶에 어느 순간 균열이 생길 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성찰의 순간. 최진영은 그 순간을 쓴다.



"내가 어떤 아이였든 무슨 상관인가.

걸음걸이마저 닮아버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할 테고 나는 이제 누구의 기억에도 엉겨 붙지 않을 것이다. 지금을 생각할 것이다."

「차고 뜨거운」258쪽.



현재가 과거에 종속되어 있음을 발견하면 다른 미래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차고 뜨거운>에서 '나'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포로다. 불행한 과거에 너무 적응된 나머지 행복한 현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과거에 마주한 끝에,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과거의 어둠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어 태양을" 찾기 시작한다(258쪽).


과거를 들여다볼 용기를 낼 때, 과거가 항상 굴레이자 저주만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도 열린다. <ㅊㅅㄹ>에서 서진은 격정적인 과거를 뒤로 하고 잠잠하고 고요한 일상을 즐긴다. 그러나 과거가 모조리 타버린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면서 느낄 감정이라고는 "극복할 수 없을 상실감, 환멸과 허무, 그리고 더해질 그리움과 연민"(100쪽)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불 같던 과거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서진은 그런 경험을 했기에 한때 자신과 비슷하게 격정적인 시대를 보내는 은율의 불타 오르는 마음을, 한없는 슬픔을 이해한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거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재다. 과거는 이미 쓰인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새롭게 다시 쓰게 될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과거가 새롭게 쓰일 때마다 현재는 과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미래를 새롭게 쓰기

미래는 우리가 앞으로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진영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쓰고 있는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미래는 불안하다. <디너코스>의 나영은 기회가 두 번 주어지지 않는 2020년대 한국의 여느 청년처럼 불안함이 응축된 존재이자 불안함이 삶의 동력이 된 인물이다. 나영은 지금과 같은 안정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고 불안해하고, 그런 미래가 도래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인간의 쓸모>에서 그리는 미래는 더욱더 극단적이다. <인간의 쓸모>의 세계는 '미래가 없는 세계'다. '쓸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쓸모를 위해 인간이 태어나고 양육되고 만들어진다. 인간의 미래가 고정되었기에 쓰게 될 것이 없는 세계다. <썸머의 마술과학>은 쓰게 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이 시대가 어떻게 미래 세대를 볼모로 잡는지를 그린다. '어른'들은 눈앞의 경제적 이익과 겉보기로는 평온한 삶에 매몰되어 자신들이 쓰게 될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신을 '썸머'라고 불러 달라는 아이의 요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적어도 파멸을 피하려는 작은 노력은 하찮다는 이유로 위선에 불과하다는 조롱을 받는다.


그런 세계에도 미래로 쓰게 될 것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의지는 존재한다. <디너코스>에서 코스가 시작될 때에는 나영에게 직장 상사처럼 멀게 느껴졌던 석진이 코스가 끝날 때에는 다시 아버지로 돌아오면서 나영은 아버지 석진의 새 미래를 응원한다. <인간의 쓸모>의 안나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가치가 부정당하고 무너진 뒤에도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렸던 다른 세계를 마주하려 나가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은 상실한 미래를 찾고 싶어 한다. <썸머의 마술과학>의 봄은 가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이면서도 '썸머'를 위해 미래를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봄은 "망했다고 말하면서"도 "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129쪽). 미약한 움직임이기에 하찮고 무가치하다는 냉소와 위선이라는 조롱에 굴하지 않고 '썸머'를 위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할 의지를 꺾지 않는다.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더 나은 미래를 쓰려는 노력은 빛을 발한다.


나는 나에게 무의미하지 않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들.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그런 것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한 사람의 인생이 바로 그것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없을 수만은 없고. 폭풍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홈 스위트 홈」261쪽



플라스틱 빨대와 텀블러를 쓰고 열심히 분리수거를 하는 개인의 노력이 비웃음을 사는 것은 한 개인은 무력하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무언가를 크게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크고 중요한 일이더라도 전인류적, 지구적,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하찮고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폭설 속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만큼의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을 집단의 한 구성 요소로서 보는 관점에서 한 개인의 가치는 무의미하겠지만, 그런 관점은 여러 관점 중 하나일 뿐이며, 당사자에게는 지극히 폭력적인 관점일 뿐이다. 나는 나에게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나의 세계이자 우주 전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대립하고 분열하고 갈등하는 고통을 겪는 것이 나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겪는 고통이 나에게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로서 살아가야 하는 내가 나를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난 현재를 살 권리가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쓸 권리가 있다.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홈 스위트 홈」 262쪽



최진영은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과거가 현재를, 현재가 미래를 만드니 사실 셋은 나뉘어 있지만 하나다. 과거는 기억의 형태로서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는 과거의 기억이 모인 총체로서 구성된 현재의 내가 만든다. 내가 지향하는 미래가 무엇인지는 나를 구성하는 과거의 산물이다.


<홈 스위트 홈>의 주인공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며, 과거의 기억과 화합하는 미래를 꿈꾸고 선택한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살아 있다는 감각"(278쪽)에 충실하고자 기억을 재현해 미래를 맞이할 집을 짓고 살기로 선택한다. <홈 스위트 홈>의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내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나'는 마지막까지 절망하지 않은 채 살고자 한다. 남은 미래를 원하는 내용으로 쓰고자 한다. 남은 시간을 원하는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 '쓰게 될 것'은 이렇게 <홈 스위트 홈>에 다다라 완성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쓰게 될 것'은 결국 과거와 현재와 미래인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홈 스위트 홈」,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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