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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쓴 글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안녕하지 못한 시대의 이야기들

by 황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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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문학동네, 2025


이 책을 읽는 내내 아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나와 내가 사는 이 사회가 혹여나 누가 볼까 숨긴,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욕망과 마음을 샅샅이 헤집어 끌어내 내 눈앞에 들이밀고 '이게 너와 너의 사회가 욕망하고 숨긴 것이 아니냐'고 물어서.


소설가의 역할은 어떤 문제점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해결하기 위해 움직일 것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의 일은 평론가 신형철이 말한 대로 세계를 더 선명하게 다시 나타나도록 '재현re-present'하고 주체의 감정을 밖으로 정확히 찍어내 '표현ex-press'하는 것(311쪽)이다. 김애란은 그 작업을 서늘할 정도로 날카롭게 수행한다.


마음과 몸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

김애란이 그리는 한국 사회는 내면의 욕망과 '좋은 이웃'이 되려는 겉모습이 끝없이 긴장하고 불화하는 곳이다. <홈 파티>에서 주인과 손님들이 일종의 연극을 하듯이, 이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좋은 이웃, 사람, 어른이 되고 싶어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깔보고 우월감을 느낀다. 돈 이외의 가치를 추구하려고 하면서도 돈이 행복의 길이라는 생각을 놓지 못하고 돈에 집착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돈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면서도 돈 달라는 요구를 불편해한다. 그런 속마음을 가리기 위해 '감사합니다'와 '고맙습니다'와 같이 진심을 숨기는 말로 위장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는 가치를 사실은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조와 비참함과 씁쓸함에 빠진다.


행복을 욕망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돈이 있다고 저절로 행복해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확실히 불행해진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더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돈이 없으면 몸 누일 곳도 없다.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자존심을 지킬 수도 없다.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 이상, 존엄성 모두 결국 경제력이 뒷받침될 때 존속될 수 있다. 행복을 욕망하는 인간이 따라서 돈을 욕망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소설 속 인물들 그 누구도 돈에 미쳐 죄를 저지르는 악인들은 아니다. 그들도 그저 우리처럼 불행하지 않고자 할 뿐이다. 불행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곳에 살면서 신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내면화해 "신자유주의 그 자체'로서', 신자유주의적 존재'로서'"(298쪽) 사는 사람들이다.


<좋은 이웃>의 학생은 자신의 선생님에게 묻는다. "공동체, 이웃, 연대"(125쪽)과 같은 가치를 "믿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126쪽)? 선생님도 답은 모른다. 오히려 선생님도 그 가치를 말 그대로 내다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상적인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데, 그 가치를 믿고 따르고 이행할 힘은 없고 방법도 모른다. 실천하고 이룰 방법은 모르는데 가치의 허상만이 남아 나를 좀먹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여전히 옳다고 믿는 마음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자각하는 몸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설 속 인물들은 좋은 이웃이 되고 싶어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상황에 감정적 동요라도 느낀다. 신자유주의적 존재가 된 자신의 내면에서 이물감을 느낄 줄 안다. 그런 최소한의 가책과 이물감마저도 느끼지 못하는/않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어떤 우월감을 느낄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실상은 '나는 돈은 없지만 네가 돈을 추구하느라 잃어버린 가치를 여전히 지키고 있어!'라는 비루한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사실은 나도 '너'가 되고 싶다고 욕망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애란은 그 모순을 잔혹하게 헤집는다.



‘나라면 어땠을까?’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좋은 이웃」, 『안녕이라 말했어』, 141쪽.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소설 속 많은 대화는 겉치레, 위장, 연극이다. 내면의 욕망을 억누르고 좋은 이웃, 건전한 가치를 추구하는 성숙한 시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노동과 서비스에 정당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려는 신실한 소비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언어는 내면의 감정을 전달하는 대신에 자신의 대외적 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너무너무 좋았어요"(<홈 파티>, 43쪽), "아니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이물감>, 187쪽). 모국어로는 겉치레뿐인 말만 늘어놓게 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모국어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 차라리 침묵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대화가 위로와 연결로 이어지는 때는 언어로 자신을 위장할 수 없을 때, 즉 외국어를 사용할 때 뿐이다. <안녕이라 말했어>에서 '나'를 오랜 외로움과 단절에서 끌어내내 과거를 향해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로버트와의 영어 회화 수업이다. 누구도 상처를 들여다 봐주려 하지 않았던 <빗방울처럼>의 나에게 누군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물어본 이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외국인이다.



이 소설에서도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건 한국인의 한국어가 아니다.

신형철, 「네 이웃을 네 돈과 같이」, 『안녕이라 말했어』, 310쪽.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한 시대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사고관을 반영한다. 상상력과 감수성이라는 단어도 경제화된 시대(304쪽), '달'이 감상의 대상에서 코인/주식대박으로 가야할 경제적 이상향이 된 시대, 아파트를 사려면 '영혼'까지 끌어모으는 시대. 오늘날 사용되는 한국어 곳곳에서 신자유주의가 침투한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시대에 돈과 신저유주의와 위계와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말하려면 지금과 같은 한국어가 아닌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외국어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한국어와는 다른 한국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사실 소통의 수단은 부차적인 문제다.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외국어는 단절에서 벗어나는 수단이지만 <숲속 작은 집>에서 외국어는 오해를 키우고 단절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 뿐이다. 이미 우리는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너무 서로 다르다. 너무나 다르기에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이해 불가능성을 해결하지 못한다. <레몬케이크>에서처럼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나의 하루와 당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다르다는 것(214쪽)을 깨닫더라도, 다름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레몬케이크>에서 나와 엄마가 그렇듯이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불안함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불안함은 소통의 토대가 되지 못한다. 지금 나의 고통이 너무 크기에, 나의 두려움이 너무 크기에 다른 이를 이해하려 할 여유도 없다. 이해하려 한들 상대의 불안함을 내가 해소해줄 수도 없다. 그저 각기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에게 민폐가 되어가며 다른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갈 뿐이다.


안녕,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매일 주고 받는 인삿말들. 안녕하지 못한 시대의 공허한 말들.


다들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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