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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이 Dec 04. 2021

마흔, 바이올린을 켜다

마흔은 뭐라도 시작해도 좋을 나이니까

초등학교 아니 그땐 국민학교였지...

시골에서 엄마를 졸라 읍내까지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꾸준히 하지 못하고 아마 바이엘쯤 하다 그만둔 것 같다. 그게 평생 후회가 된다. 악기 하나 다루지 못함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큰 딸 민아는 학교에서 방과 후 교실에서 바이올린을 배운다. 1학년 때 손이 너무 아프다며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말로 선생님과 함께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민아의 마음을 다독이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감사하게도 민아는 힘든 고비를 넘겼고 2학년이 된 지금도 바이올린을 잘하고 있다. 동요 몇 곡쯤은 거뜬히 연주하게 되었다. 나도 악기 하나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내 마음을 떠난 적이 없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런 생각은 늘 품고 지냈다.

 

 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것이 늘 마음에 한이 었던 나는 넷째가 돌 때쯤 되었을 때, '바이올린 배우고 싶다'는 어렴풋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중고 사이트에서 바이올린을 구입하는 것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난생처음 바이올린 선생님을 만나 레슨을 받았다. 돌쟁이 아가 포함 온 가족이 엄마의 바이올린 레슨을 위해 총출동했다. 내가 레슨 받는 동안 남편은 1시간 동안 네 명의 아이들을 돌봤다.


 어느 날 아침은  레슨 가려고 준비하는데 민찬이가 몸이 편치 않은 지 엄청 칭얼댄다. 콧물도 주룩주룩.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러 가도 되는 것인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녀와서 더 아프게 될까 봐 걱정도 되었다. 내 욕심 채우려고 돌쟁이 아가에게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하는 건 아닌 자기 마음이 쓰였다. 아무튼 우리 온 가족은 레슨 장소에 도착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여러 사람의 희생 속에서 얻어낸 레슨 시간은 내게 참으로 귀하고 귀했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눈을 반짝거리며 선생님 말씀에 집중했다. 받침을 끼우는 법도 활을 잡는 법도 몰랐던 내가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아직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다. 그저 감사하고 설레고 기쁜 일이다. 평생을 살아가는 내내 음악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줄 거란 생각에 기쁘고 감사하다. 먼 훗날,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서도 손주들과 함께 바이올린 연주하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틈만 나면 우리 집에서 바이올린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상의 무료했던 틈을 민아와 바이올린 연주하면서 채우고 있다. 우리가 연주하니 민혁이와 민유도 바이올린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남편까지 배우면 온 가족이 연주하는 모습 상상으로만 남아있진 않게 될 듯하다.  지금 내가 연주하는 건 음악이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이것 만으로도 난 신기하고 감사하다.


 바이올린....이라고 하는 것은 늘 타인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만 들어왔다. 내가 연주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내게 너무 멀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나고. 난 이 정체모를 것을 내가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조차 없었다.  


 매번 상황은 열악하고 힘들었으나 그때, 내 손의 움직임에 의해 아직 음악이 되지 못한 소리들이 나는 것만으로 얼마나 신기하고 설렜는지 모른다.             


레슨 때마다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선생님, 제가 바이올린이라는 것을 잡고 뭔가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신기해요."


작은 별, 나비야를 겨우 겨우 연주하면서도 이렇게 아이처럼 신나고 들뜬 내 모습을 보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 바이올린 시작하면 손도 아프고 온 몸이 쑤셔서 다들 힘들어하는데 송이님은 처음부터 이렇게 좋아하시니 전 그게 더 신기해요."


겁도 없이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나의 북콘서트 때 모셨던 연주자들 중 한 명이 레슨 선생님이 되어주셨다. 나도 그들처럼 음악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꿈을 품었다. 악기 중에 바이올린이 가장 예민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이어오던 레슨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배운 열 곡을 조금씩 혼자 연습하는 것도 코로나로 학교와 어린이집이 멈추고 네 아이가 모두 집에 머물게 되면서 어렵게 되었다. 그렇게 내 삶 속에 잠시 들어왔다 나가버린 바이올린이었다. 그냥 이대로 보내기엔 너무 아쉽고 슬픈 마음이 생겼다. 바이올린을 가방에서 꺼내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몇 달이 흘러버렸다. 몇 달 동안의 공백이 지금까지 배운 것들도 다 까먹게 했을까 봐 너무 걱정이 되었다. 악보도 잘 못 보고 음악에는 별 소질이 보이지 않는 나라 더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몇 달 동안 처박아 두었던 바이올린을 다시 꺼냈다. 줄이 하나 끊어져 있었는데 줄도 새로 갈았다. 아직 많이 연주하지도 않으면서 그간 끊어먹은 줄이 몇 개째인 줄 모르겠다. 바이올린도 재정비하면서 육아에 집중하느라 멈췄던 연주를 다시 하리라 마음먹었다.


 아이들 다 떠난 집에서 악보를 펴고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폼을 잡고 활을 올리고 내렸다. 난다. 소리가.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작은 별도 나비야도 주먹 쥐고도 봄바람도 내 몸이 기억을 한다. 와 정말 신기하다. 몸으로 익힌 것은 오래 남는다더니 몇 달 동안 잡아보지도 못한 바이올린인데 금방 연주가 다시 된다.


 처음 레슨을 시작했을 때처럼 설레고 기쁘고 가슴이 마구 뛴다. 지금까지 배운 열 곡이라도 매일매일 연주하면서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야지. 난 그저 바이올린 연주하는 내 모습이 마냥 신기하고 좋다. 열 곡만 연주하더라도 이 바이올린을 평생 내 품에 끼고 놓고 싶지 않다.


다시 내 삶에 들어온 바이올린아,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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