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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pr 23. 2023

열두 살의 박완서, 마흔두 살의 박완서


 박완서 님을 만났다.

 30여 년 전 일이다. 엄마가 같은 아파트 옆 레인 사는 할머니에게 떡을 전해주고 오라고 했다. 같은 성당 다니는 분이랬다.

 “유명한 작가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당시 난 초등학생이었다. 열두 살 쯤이었을 것이다. 작가라는 말에 혹했지만 그분의 책을 읽어본 적 없기에 초인종을 딩동 누르고 무심결에 떡을 전해드리고 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던가, 아마도. 그 후로 두어 차례 더 엄마의 잔심부름을 하러 그 할머니네 초인종을 눌렀다.

 중학생이 되고 엄마 책장에 있던 그분 책을 읽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남성성이 막 꿈틀거리던 시기라 먼 나라 얘기 같았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다 읽었다. 그때만 해도 와, 그 할머니 진짜 작가이셨구나, 그랬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박완서 님을 다시 만났다.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서였다. 그분이 남긴 소설과 산문집을 읽으니 단단했던 마음이 뜻 모르게 허물어지고, 허물어진 마음이 다시 단단하게 여물었다. 훈계하지 않는 글이었다. 성찰과 여백만 가득한데 읽는 이를 들끓였다. 이 분이 나 어릴 적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단 말이지? 엄마 그때 좀 더 호들갑 떨어주지 그랬어 나한테. 머리라도 며칠 안 감았을 건데.

 지난겨울 인천 문학소매점에서 구매한 박완서 님 단편집을 봄이 다 되어서야 읽었다. 여직껏 못 읽은 그의 책이 많다. 이번 단편집 제목은 <배반의 여름>이었다. 부사 하나 찾기 어려운 담백한 문체로 쓴 짧은 소설들에 출퇴근길 기차간에서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는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쓰였다는 첫 단편 <겨울나들이>부터 마지막 <공항에서 만난 사람>까지 어느 하나 빠지거나 보탤 것 없이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적어낸 삶은 남루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근사했다. 이 단편집을 백 년도 넘은 거리, 말로는 못할 나만의 기억을 간직한 골목의 소담한 책방에서 집어 들었다는 것조차 근사했다.

 책을 덮을 무렵 기찻길 창문 바깥으로 해가 여물었다. 이젠 그 시절의 나 만한 아들내미를 둔 아빠가 된 마당에, 불현듯 30여 년 전 어린 나에게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신신당부라도 해주고 싶어졌다.

 ‘지금 이 순간을 똑바로 기억해 둬. 어쩌면 생애 가장 근사한 기억이 될지도 모르니까. 네가 떡을 전해드릴 그분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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