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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pr 16. 2023

실패할 줄 알면서도

<조금은 다른 연호의 선행학습>


 연호는 유소년 축구를 한다.

 U-9, 그러니까 만 9세 이하 축구 대회에 자주 참가하다 보니 아빠 된 입장에서 주말마다 같이 전국을 쏘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보름 전엔 양양에서, 보름 뒤엔 인제에서, 다음 달엔 충주에서 대회가 열린다. 매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응원하려니 안 그래도 약한 목이 평소에도 늘 쉬어 있다.

 내 눈이 정확하다면 연호는 선수가 되긴 글렀다. 체격도, 시야도, 발기술도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다. 그런데 열정만큼은 진심이다. 주 6일 매일 두 시간씩 훈련을 하고 집에 와서도 축구 영상만 보고 아빠와 대화 주제도 축구뿐이다. 가끔은 고 조그만 것들끼리 며칠씩 합숙까지 떠난다. 그러다 보니 수학이나 영어 같은 다른 공부는 언감생심 기대도 못 한다.

 (심지어 춘천 출신) 손흥민 같은 선수가 되겠다는 연호의 꿈을 부모가 깰 순 없기에 지금은 스스로 한계를 깨닫기만 바라고 있다. 이 마음이 참 복잡하다. 현실 자각을 하라고 더 수준이 높은 유소년 클럽으로 보냈는데, 후보로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의도가 먹혔구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짠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단 1분이라도 뛰게 해 줬으면..’ 두 손을 모으다가도 ‘이렇게 현실 직시를 해야지’라며 정신 차리기를 되풀이한다.

 무엇보다 가족구성원 모두가 신난 게 더 문제다. 연호는 9년 인생 처음으로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을 만났고, 평생 축구광이던 나는 안 그래도 매주 보던 축구경기에 아들내미가 뛰고 있으니 눈이 뒤집어질 만큼 재미를 느낀다. 조종하는 축구 게임에 아들이 불쑥 들어가 있는 기분이랄까. 티켓값이 있다면 10만 원을 줘도 안 아까울 빅 매치를 매달 직관하며 사는 셈이다. 여하튼 우리 가족은 어느새 대회가 있는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며 살게 되었다. 어쭙잖게나마 같이 전략도 짜고, 쉬는 주말이면 동네 풋살장에 나가 연습도 한다. 밤에는 나란히 누워 유명 선수들의 동영상을 보며 움직임을 논하다 잠든다. 제대로 따라 하지도 못할 거면서.

 언젠가 -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 연호는 축구를 그만둘 것이다. 열정으로 넘을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있는 법이니까. 그 순간이 가급적 빨리 오는 게 모두에게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결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땐 ‘미리 공부나 시킬 걸’ 후회하겠지. 선행학습은커녕 제 학년 교과서도 풀기 버거워하는 연호를 보고 있으면 이미 부모의 조급함은 발동된 듯하다.

 그러나 연호는 책상머리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매일 잔디밭에서 땀 뻘뻘 흘려가며 터득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게 눈에 다 보인다. 팀플레이를 통해 자신에게 알맞은 포지션을 찾아가고, 싸우던 상대와도 경기 끝나고 악수하는 매너를 갖추고, 자신이 아닌 동료가 골을 넣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축하해줄 줄 아는 어린이로 연호는 커 가고 있다. 게다가 벤치에 오래 앉아있어 봐서 그런지 가끔 주전으로 출전하면 경기 끝나고 가장 먼저 벤치의 동료들에게 달려가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실수로 골을 헌납하고 침울해 있으면 어느새 팀 주장인 동갑내기 친구가 연호에게 다가와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린다. 공부보다 먼저 배워야 할 덕목들, 어쩌면 대부분 아이들이 공부부터 하고 보느라 어른이 되어서야 억지로 구색 맞추듯 갖추는 덕목들을 축구를 통해 선행학습하고 있는 셈이다. 그걸 목격하는 매 순간이 대견하고 신비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도 지금 이 순간을 쉬 포기하지 못하겠다. 공부고 미래고 뭐고 다 떠나서 가족 모두가 주기적으로 들떠 있는 삶이라는 거, 얼마나 귀한 순간인가. 평생 취미이자 친구였던 축구가 이렇게까지 더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새로이 알아가는 요즘이다. 안 본 사람은 이맛을 절대 모를 거다. 흠모하는 혼비 작가님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연호가 스스로 축구를 접겠다고 선언할 그 예견된 미래엔, 올게 왔구나 잘 됐다 싶으면서도 고 조그만 품에 안겨 내가 더 펑펑 울 것만 같다. 남은 생에서 이보다 더 즐거운 순간을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p.s 그래도 팔불출 아빠답게 마지막 사진은 연호(당시 등번호 17번)의 ‘지극히 희귀한’ 돌파 후 어시스트 장면 동영상을 올린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 희귀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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