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에요?” 유진이가 물었다.
“여기? 울산이지…”
“아니에요, 할머니. 여기는 울산이 아니고 서울이에요. 할머니가 서울로 이사를 오셨어요.”
“그래, 내가 어제 서울로 왔지.”
“할머니, 어제 서울로 오신게 아니라 서울로 오신 지 벌써 6개월이 지났어요.”
그렇게 같은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됐다.
“할머니, 우리 동네 이름은 뭐예요?”
“여기가… 어디라고?”
“서울이에요, 서울 혜화동.”
할머니가 혹시 길을 잃을까 봐,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혹시라도 엄마가 길을 잃으면 우리집에 찾아와야 하니까요!
혜화동!
유진하우스!
우리집이에요!라고 말해야해요.
“엄마, 어디 사신다고요? 혜화동 유진하우스요. 유진이 이름은 기억하잖아요? 유진이를 떠올리면 유진하우스도 기억날 거예요. 알겠지요?”
“혜화동 유진하우스, 기억나죠?”
엄마가 금세 잊어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되뇌었다. 무의식의 한 자락에라도 스며들기를 바라며, 마치 주문처럼 ‘혜화동 유진하우스’라는 말이 엄마의 입에서도 자연스레 흘러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끝없이 되풀이했다. 자꾸 반복하면 잊어버린다고 그만하시겠다고 그 와중에도 우리를 웃겨 주셨다.
엄마의 걸음이 조금씩 회복되자, 가출 반경도 함께 넓어졌다. 혜화동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을 때가 늘어갔다. 주로 큰길을 따라다니시던 엄마가 어느 날은 갑자기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버리면, 그 순간부터는 미로처럼 어디로 향하셨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면, 혹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들어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계신 건 아닐까, 별별 상상과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마 성북동까지 가셨을까 하는 마음을 다잡으려던 어느 날, 한성대입구역 앞 횡단보도에서 넘어지신 것을 본 분이 신고를 해 주어, 고대 안암지구대에서 연락이 왔다. 그 순간 가슴 밑바닥까지 차갑게 식어 내려가는 듯했다.
“김옥란 할머니를 모셔 두고 있습니다.”
안암 지구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엄마를 찾아 헤매느라 진이 빠져 있던 나는, 그 말이 들리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한 발도 뗄 수가 없었다. 안도감이 밀려오며 몸이 주저앉는 듯했다. 다행히 울산에서 미리 해 두었던 지문 등록 덕분에 엄마를 찾을 수 있었다. 경찰분들은 바쁜 와중에도 엄마를 정성껏 모시고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낯선 도시에서 엄마를 지켜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뜨겁게 밀려올 뿐이었다.
“엄마, 이제 저 먼 파출소까지 모셔오게 하면 어떻게 해요. 경찰분들이 얼마나 바쁜데…”
엄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경찰들이 자기 할 일을 한 건데, 뭘 그러냐.”
그러고는 경찰들이 어디 사느냐고 계속 묻고, 너무 많은 걸 캐묻는 바람에 대답하느라 혼이 났다고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듣는데, 마음 한 켠이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낯선 상황에서도 엄마가 이렇게 말끝을 붙일 여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그럼에도 정작 ‘혜화동 유진하우스’라는 단어는 끝내 기억 속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했다.
“파출소에 스무 번 쯤은 드나들어야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을 살기로 했다. ‘혹시 엄마가 또 넘어지면 어떡하지?’ ‘오늘은 어디까지 기억하실까?’등 엄마가 다칠 것,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내일의 일이다. 엄마에 대한 염려는 끝이 없지만, 엄마는 늘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엄마처럼 지금 이 간을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