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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Dec 03. 2024

스페인에 살 수 없어 서쪽으로 떠난 콜럼버스

동쪽으로 갈 수 없으니 서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는 숨었다. 그가 숨기려 했던 것은 이름인지, 신념인지, 혹은 그가 태어난 자리 자체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는 세계의 끝에서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말하며, 스페인 여왕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동쪽으로는 갈 수 없으니 서쪽으로 가겠다는 그 말은 결단이 아니라 술책이었다. 그의 항해는 지도 위의 거리가 아니라 자신을 숨긴 거리, 그 간극을 잇는 여정이었다.


1492년, 유대인의 추방과 스페인의 승리, 그리고 가톨릭 세계의 팽창은 콜럼버스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에 최적의 무대였다. 유대교 개종자라면, 정체를 버린 사람이라면, 그는 남아 있는 삶을 새롭게 구축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유대인이 아니었고, 하나의 신념으로 살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항해였다. 바다는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았다. 바다에는 신앙도, 정체도 없다. 그는 배를 띄우며 바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버리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이교도의 이름으로 머무를 것인가. 삶을 이루던 것을 잃느냐, 신앙을 감추고 살아가느냐의 기로에 선 유대인들이 있었다. 무모해 보이는 콜럼버스의 항해에 투자하는 일은, 가진 것을 스페인 귀족들에게 빼앗기는 것보다 나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동쪽이 막힌 세상에서 그들에게 남은 길은 서쪽뿐이었다.


여왕에게 그의 말은 단호했다. “동쪽은 막혀 있으니,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속에 담긴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동쪽과 서쪽의 간극은 바람이 채우고, 물결이 지우며, 지평선이 그것을 증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여왕에게 매혹적이었다. 부와 영광,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은 여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여왕을 설득하며 자신의 정체를 더욱 깊이 감췄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대담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숨겨야 했던 이름과 신앙, 그리고 그가 감히 떠났던 새로운 세상의 무게가 그의 항로를 따라 맴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을 잃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항해였고, 그 항해 끝에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끝내 자신을 찾았을까, 아니면 그의 이름만이 역사의 물결 위에 떠다니는 잔상으로 남았을까? 그의 항해는 단지 새로운 대륙을 향한 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숨기고, 감추며, 잃어버린 자리를 무언가로 채우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룬 발견은 단순한 영광이 아니었다. 그의 발자국 뒤에는 신대륙 원주민의 땅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학살되고, 문명이 무너졌다. 정체를 숨긴 채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는 다른 세계를 지우는 대가로 가능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과 타인의 파괴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정당화는 누구의 목소리로 기록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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