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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Oct 15. 2024

숫자의 지배

몇 개국을 여행했는가를 보고 떠오른 그냥 잡다한 생각

 예를 들어, "10개국 30개 도시". 뭐,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SNS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식으로 쓰여 있는 프로필들을 간혹 보게 된다. 나 역시 프로필에 여행한 국가 수를 써두긴 했다. 어쩌다 보니 여행 크리에이터로 살게 됐고, 그러다 보니 또 타인에게 내가 얼마나 여행을 많이 다녔는지를 알리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써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몇 개 국가를 여행했는지 몇 개 도시를 다녔는지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한 국가, 한 도시를 여러 번 여행하면서 깊게 경험하고 진득하게 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러 국가를 여행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보다 적은 국가를 여행한 사람보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지금까지 56개국을 여행해 왔지만, 각 국가별로 혹은 도시별로 큰 편차가 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은 한 국가로 카운팅 되지만 한 달 살기만 다섯 번에 짧은 여행도 세 번이었다. 반면에 파나마의 경우 쿠바에서 산티아고(칠레)로 들어갈 때 잠시 머물렀던 것이 전부이다. 똑같이 한 개의 국가로 카운팅 되더라도, 그 안에서의 실질적인 경험의 깊이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처럼, 새로운 문화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되도록 많은 국가/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곳을 찍고 돌아오겠다면서 허겁지겁 이동하기에만 바쁘다면, 이른바 수박 겉 핥기가 될 위험도 배제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념의 끝에서 문득,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숫자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나이, 학생들에게는 성적표, SNS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팔로워수나 조회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장 잔고 숫자 등등. 많은 곳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숫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숫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싶다. 몇 개 국을 여행했든, 몇 개 도시를 방문했든 여행을 할 때에는 가장 '나다운' 경험을 하고 싶으니까. 오늘도 통장 속 숫자를 애써 외면하면서 슬그머니 여행 준비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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