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맵을 맹신하면 벌어지는 일
내가 어렸을 때, 여행을 좋아하시던 아빠를 따라서 우리 가족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엄마는 딱히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작정 차를 타고 떠나는 아빠의 옆을 지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MBTI 검사를 해본 건 아니지만 우리 아빠도 분명 완전히 P의 성향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뒷좌석이 아닌 운전하는 아빠 옆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그때부터 아빠는 조수석에 나를 앉히고 커다란 지도책 한 권을 쥐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지도를 보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해서, 갈림길이 나왔을 때 아빠에게 어디로 갈지 말해 달라고. 딱히 앞으로의 계획도 목적지도 없었던 우리 가족의 여행은, 그렇게 나의 기분대로 루트가 정해지게 되었다. 처음 받아 든 두꺼운 우리나라 지도책.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 길을 따라가면 어디로 가는지 찾아보면서 지도를 보고 길 찾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평소에도 지도 보는 일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더불어 점점 길눈도 밝아지게 된 것 같다. (이런 것이 조기 교육의 장점인 건가?)
그래서인지 처음 해외여행을 나갔을 때도 지도 한 장만 손에 들려 있다면 별로 무서울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장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길들을 찾아가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기만 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꼬깃꼬깃 접어서 가지고 다니던 종이 지도는, 이제는 모바일 속 지도로 바뀌었다. 덕분에 지금은 구글 맵을 켜고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구글 맵을 철석같이 믿고 나섰던 길에서 아주 큰 공포를 느껴야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갈에서 서너 번 정도의 한 달 살기를 하고 난 후에 생겼던 일이었다. 리스본 시내는 이제는 딱히 지도가 없어도 마치 현지인이 된 것처럼 걸어 다니게 되어 버려서, 이제는 오히려 좀 낯선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슬몃 들게 되었다. 덕분에 리스본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 동네로 놀러 가보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테주 강을 건너면 나오는 '트라파리아(Trafaria) 해변'에 가보기로 길을 나섰다.
벨렝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트라파리아 선착장에 내렸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해변까지 구글 맵으로 가는 길을 검색해 봤더니, 걷기에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고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 와본 동네에서 길도 익힐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카페에서 에스프레소(카페 비카)와 맥주도 각각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일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구글 맵이 알려준 경로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착장 근처 동네가 금세 끝나고 주변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인적이 점점 없어지더니 공터 같은 곳이 나타났고, 거길 지나치니 이번에는 허름한 판자집들이 늘어선 동네가 나타난 것이었다. 어쩐지 쎄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나가려니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 심지어 이 근처에는 버스도 정거장도 없고 길을 지나가는 택시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걷던 길을 계속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그곳 분위기가 슬럼가와 같아서, 혹시 누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한껏 긴장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동네 어귀를 지나가려고 했다. 불현듯 나타난 외국인, 거기다 그리 많지 않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지만, 다행히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불안한 눈동자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네 한복판을 지나갈 즈음 마침 다른 여행자 일행이 반대편에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그 기회를 틈타 최대한 태연하게 동네를 빠져나왔다. 그 지역을 완전히 빠져나온 후에도 한동안 더 걷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가려고 했던 '트라파리아 해변'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긴장했던 탓에, 대서양 넓은 바다를 본 감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갈 때는 우버를 불러서 탔다. 우버 안에서 보니 구글 맵이 걸어가라고 가르쳐준 그 길 말고, 시내를 관통하는 안전하고 평범한 다른 경로가 있었다. 구글 맵이 최단 경로랍시고 가르쳐준 길 말고 조금 더 잘 찾아보고 알아봤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구글 맵은 프로그램이고 기계이기 때문에, 안전이고 뭐고 다른 조건 없이 오직 물리적 거리만을 고려하는 최단 거리를 알려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지금도 지도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심심하면 구글 맵을 켜고는 세계 곳곳의 지도를 보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구글 맵을 맹신하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에서 최단 거리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안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