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연출에 대해 고찰해본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공연이 없는 주말에는 다른 연출가들의 공연을 보러 다닐 때가 많다. 우와~ 하는 탄식이 나오는 공연들도 있고, 에이~ 하는 야유가 나오는 공연도 있지만, 그 어떤 공연에 가도 최소한 한 번 정도는 깜짝 놀라는 것 같다. 물론 깜짝 놀라는 것에도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소리도 지를 수 없을 만큼 깜짝 놀라 가슴을 움켜 줘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이구머니나' 하며 후회와 한숨이 반반 정도 섞인 탄식이 동반되는 놀람이 있고, '이런... 썅…' 하며 욕지거리부터 나오는 기분 더러운 깜짝도 있는데,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용을 만나서 겪은 이 깜짝 놀람은 앞의 세가지 놀람이 정비율은 아니고 어떤 반비율인지 피보나치 비율인지, 아 피보나치는 비율이 아니라 수열인가, 아무튼 그렇게 요상한 잡탕 놀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배워온 내가 믿어온 모든 진리 체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한, 토마스 쿤이 봤다면 "이것이야 말로 패러다임 쉬프트지!" 라고 외칠 법한, 뉴턴의 물리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법칙이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씀이나 아침 조례 시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이 내가 믿어왔던 모든 진리라는 것들이 한 순간에 쓰레기가 되는 그런 느낌의 놀람이었다. 내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조차도 이 정도로 깜짝 놀라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순수이성비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 놀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집을 나서서 오늘은 괜히 갈색 구두를 신었나, 오늘 같은 복장에는 운동화가 어울릴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하며 아직 지하철을 타지 않았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신발을 갈아 신고 나올까 말까 고민을 하던 바로 그 때!
길 저편에서 키가 족히 10미터는 될 법한, 살아 움직이는데 그치지 않고, 정말 반칙스럽게도 불까지 내뿜는 붉은 색 용을 만나게 되면 느낄 법한 그런 놀람이다. 그 뭐랄까, '아이구머니나' 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그렇다고 가슴만 움켜 쥐기에는 불이 너무 뜨거운 데다가, 욕을 하기에는 근처에 관객들이 있어서 도무지 그럴 수 없는, 그런 놀람 말이다. 내가 보던 공연 중간에 갑자기 나타난 용이 바로 그랬다.
그 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등에는 어떤 총알도 모두 튕겨낼 것 같은 비늘이 박혀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그 비늘은 예산이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았는지 복사-붙여넣기를 한 듯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용의 눈빛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치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관객들이 이렇게 놀랄 줄 알았다는 듯,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를 그런 근자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어떤 관객도 감히 그 용의 존재이유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장식되어 있는 입에서는 이따금 불을 뿜어내었는데 사실 나의 솔직한 속마음으로는 콘서트 특수효과팀의 불꽃장치보다도 보잘것없어 보였으나 그런 말을 내뱉는 순간 불꼬치가 되어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감히 비웃지 못했다. 그 용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대한 날개를 자랑스럽게 펄럭이며 영상 속 세계를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어디로 날아가는지, 왜 불을 뿜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용이 왜 나왔는지 도대체 나의 좋지 않은 머리로는 이유를 유추할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용이 나왔을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월리를 찾아라 책을 보는 것처럼, 매직아이 마냥 정신이 혼미해지며 미궁 속으로만 빠져드는 것이었다. 영상이 나오기 바로 전에 부른 곡 가사에 '용'이 들어가 있었는데 내가 너무 집중을 안 해서 몰랐던 것은 아닐까, 혹은 저 용이 날아가다가 불을 뿜는데 숲이 통째로 타면서 클로즈업된 잿더미에 아주 우연히도 다음 곡 제목이 쓰여 있는 것은 아닐까. 용에 멤버가 타고 있나 고민도 했지만, 그건 어릴 적 꾸러기 수비대에서나 나오는 장면 아니었나? 아니면 어쩌면 저 용이 이 공연을 하는 가수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라. 멤버들 중에 76년 생이나 88년 생이 있었던가. 아! 혹시 멤버들이 나타나서 저 사악해 보이는 용을 물리치는, 안데르손 저리가라 할 법한 권선징악적 내용인가? 가만... 올해가 용의 해였었나…
얼마나 당황했던지 나 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수많은 관객들도 모두 숨을 죽여 그 용을 관찰하고 있었으나, 그 뜨거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은 아주 자랑스럽게 날갯짓을 하면서, 나의 모든 예상들을 비웃으며, 아주 유유히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용꼬리의 끝자락이 화면을 완전히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공연장에는 무언 무형의 거대한 물음표가 표류하고 있었다.
1789년 7월 14일, 날씨 맑음. 왕의 명령이 곧 법이던 시절, 짐이 곧 태양이던 그 때, 삼부회 최고책임자에서 부당하게 파면된 네케르를 구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 앞에 약 1만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네케르의 사면을 요구한 그 시민들은 급기야 감옥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후 각 지방의 시민들이 영주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불과 2주일만에 수많은 시민들이 자유를 얻었고, 시민들의 세금을 받아서 생활하던 소수의 성직자 및 관료 집단은 처형당했다. 세상은 바뀌었다.
한편, 그보다 150여년 전인 1624년 3월 13일,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인조의 사신을 죽이면서 역모를 일으켰다. 파죽지세로 평안도를 거쳐 3월 29일, 당시 수도였던 한성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을 세웠지만 불과 이틀 후, 이괄은 토벌군에 패퇴하여 처형당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이 세상 공연 연출에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설령 어떤 정답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정답을 강요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콘서트에 용이 나온 것이 프랑스 혁명인지, 아니면 이괄의 난인지, 그에 대한 판단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심지어 어쩌면 그 공연의 연출가는 공연장에 있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숭고한 예술적 이유를 그 용에 담았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순수예술이 아닌, 대중예술, 그것도 일회성으로 소비되는 공연 연출을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관객 대부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친절한 연출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공연장의 관객들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숨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그 공연에서 용이 나오면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이 글은 과거 내가 콘서트 연출 PD로 활동하던 당시에 혼자 썼던 글이다.
용이 나온 콘서트는 2014년 빅뱅 콘서트였고, 그 콘서트를 보고 생각했던 바를 기록했던 일기장에서 발췌하였다.
당시 나는 콘서트계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이 글을 발표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콘서트 쪽에서 많이 멀어졌기에 글을 싸질러 본다. (그리고 빅뱅도 그 연출가랑 더이상 일하지 않기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