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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초연 Oct 04. 2019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

칼을 뽑아 드는 마음에 대하여

언젠가 술자리에서 J는 물었다. "너는 사랑을 본 적이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랑을 본 적 있어.” J의 표정이 너무나도 단호해서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홀린 듯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있잖아. 내가 퀸즐랜드에 있는 토마토 농장에서 일할 때였어. 주변에는 온통 키 큰 수수밭과 토마토 농장 밖에 없어서 할 만한 게 사랑밖에 없었거든. 다들 나이대도 비슷하겠다, 머나먼 타지에 와서 모두가 외롭겠다, 그만큼 사랑에 빠지기 좋은 환경이 어디 있겠어? 나도 그중 하나였어. 그때 만난 게 K였어. 낮이면 같은 토마토 농장에서 일을 하고 밤이면 같은 집으로 돌아와 셰어 메이트와 함께 지내니 정말 매일이 천국 같았지.


그렇게 몇 개월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리 지역에 흉흉한 소문이 돌더라고. 동양인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고 말이야. 우리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 범죄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옆 동네에서도 일어났다나. 용의자는 키가 크고 턱수염이 긴, 어깨까지 오는 금발을 한 왜건을 타고 다니는 남자라고. 힘없는 동양인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풍문으로 떠도는 용의자의 생김새를 외우는 것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잔업을 마치고 수수밭길을 따라 혼자 집으로 걸어간 날이었어. 일을 마치고 멀리 떨어진 마트에 다녀오느라 남들보다 조금 늦은 퇴근이었지. 평소에는 K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마침 그 날은 K와 싸워서 혼자 걸어서 가게 되었어. 워낙 조용한 동네였으니까 별생각 없이 걸어간 거지.


그런데 있잖아. 수수밭길을 절반 정도 따라 걸었을 때였나, 저 멀리서 웨건 한 대가 조용히 따라붙더라고.

혼자가니? 태워줄게. 서글서글하게 생긴 오지가 말했어. 아니 됐어. 나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어. 웨건은 내 걸음에 맞춰 속도를 줄이더라. 한참을 걸었는데도, 계속 나를 따라오더라고. 순간 등부터 서늘해지면서, 어쩌면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사람인가, 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더라. 지금이라도 뛰어야 하나, 수수밭으로 숨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남자친구인 K에게 전화를 걸었어. 음악을 바꾸는 척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전화를 안 받더라고. 뭘 하고 있었나 봐.


그러는 중에도 웨건은 계속해서 나를 쫓아왔어. 태워줄게. 타고 가. 남자는 계속해서 소리쳤어.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길에는 그 남자와 나, 단 둘이었으니 별 수 있겠어. 그래서 말했지. 그래 알겠어. 나는 웨건에 올라탔어."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술자리에 모인 모두가 J의 선택에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거 아니야? 거길 어떻게 올라탈 생각을 하냐, 도망을 쳤어야지, 경찰을 불렀어야지, 의견은 분분하게 갈렸다. 남자 동기들은 미쳤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항시 여성 대상 범죄에 노출된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이성적인 사고판단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아가 J의 상황은 더욱 최악이지 않는가. 길 위에는 낯선 외국인과 나, 그 와중에 동네에 그런 흉흉한 소문이 돌면 나라도 별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너무나도 단출했다. 너무 무서웠겠다. 별 일 없어서 다행이다. 겨우 이 정도의 연약한 위로를 건네면서 J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창문을 내렸어. 혹시라도 안에서 잠글 수 있잖아. 참, 내가 영어를 잘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어릴 때 캐나다에 보내 준 부모님에게 감사하면서, 일부러 그 남자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건넸어. 그가 날카로워지지 않게 계속해서 살피면서 말이야. 그렇게 몇 분을 달렸나, 수수밭의 끝이 보일 무렵 저 멀리 셰어 하우스가 보였어. 여기서부터는 내가 아는 길이었어. 밤마다 K와 산책을 나오는 길이었거든. 여기서 뛰어내려 수수밭길을 가로지르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어. 남자가 내 농담에 어느 정도 기분이 풀어진 것처럼 보였을 때 속으로 숫자를 셌어. 셋, 둘, 하나. 그리고 문을 열고 뛰어내렸어.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뒤에서 남자가 소리를 질렀던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뒤를 돌아볼 정신도 없었어. 달리다 넘어지고 뒹굴고, 긁히면서도 집으로 가는 방향만은 정확하게 지키려고 노력을 했어. 그렇게 십여분을 쉬지도 않고 달려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


집에 도착했을 때 셰어 메이트들은 내 꼴을 보고 까무러칠 듯 놀랐어. 온몸이 피투성이에 머리는 모두 헝클어졌고, 눈물자국이 가득한 내 얼굴은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애' 였으니까. 셰어 메이트들은 방에 있던 K를 데려왔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헤어지녜, 마녜 서로 냉랭하게 대했던 K는 내 꼴을 보자마자 눈빛이 변하더라고.


뭐야? 누가 그랬어? 나는 퇴근 후에 IGA에 들렸다, 수수밭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는데, 웨건 한 대가 나를 쫓아왔고, 그 차에 탔다가 도망쳐 왔다고. 수수밭길을 가로지르면서 뛰어오느라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어.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거든. 긴장이 풀려 그저 주저앉았어. 그저 단 한 단어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어.


웨건.


그 말을 들은 K는 곧장 주방으로 가더니, 서랍 열어 식칼을 하나 꺼내 들더라. 그리고 그 길로 집을 나갔어. K가 돌아온 건 몇 시간이 지난 늦은 저녁이었어. K도 수수밭길을 헤맸는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더라. 그날 밤 K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다만 나를 오래오래 쓰다듬어 주었고, 우리는 다음날부터 싸우기 전날처럼 다정하게 지낼 수 있었어.


그 후로는 이따금 누군가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K의 뒷모습을 떠올려. 주방으로 걸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식칼을 집어 들었던 그 단호함.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 짐작하면서, 똑같이 해주겠다는 그 마음. K는 사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야. 겁이 많거든. 웨건을 탄 남자를 봤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고. 하지만 그 순간만은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웨건을 탄 그 남자는 주키니 농장의 슈퍼바이저였다는 것도, 동양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모두 가짜였다는 게 밝혀졌고, K와도 호주를 떠나면서 헤어졌지만, 여전히 그 날 일은 내게 있어 여러모로 복합적으로 남아있어."


J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초연아, 너도 누굴 만날 때 곰곰이 생각해 봐. 이 사람은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을 때, 곧장 식칼을 들고나갈 수 있을까. 가로등 하나 없는 밤길을 오직 누군가를 위해 헤맬 수 있을까. 그런 단호하고 든든한 뒷모습을 네게 보여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J는 조언했다. 나는 지난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그 날 술자리에서는 결국 과음을 했다. 그런 뒷모습을 보여준 사람과도 결국 헤어진다는 사실과, 지금까지 내게 그런 단호함을 보여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까닭에 한없이 참담해졌으므로.


그러나 그것이 과음의 결정적인 이유라 할 수는 없다.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지점은, 그런 뒷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치 온 우주에 홀로 남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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