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먹고 사는 마음에 대하여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한다.
아, 오늘 뭐 먹지?
정말이지 한 달 전과는 사뭇 다른 아침이다. 그때의 내 아침은 대략 이랬다.
2호선 안에서는 당산철교가 무너져서 회사에 가지 못하게 되길 빈다거나, 아니면 여의도에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하길 빈다거나, 아니면 갑자기 회사가 무너져내린다거나... 뭐 그런 생각. 여의도 모 기업에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러면 안 되지만) 조금 좌절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밝은 나날은 아니었다.
월 7회 이상 밤 12시 퇴근, 백업 인력 없음, 이따금 주 6일 출근. 이 키워드로는 나의 지난날을 모두 설명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보름간 하혈을 했고, 연차일 때도 일을 했으며, 심지어 대학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일했던 걸로는 설명할 수 있을까? 못하겠지. 그냥 너무 지쳤고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퇴사했다. 서른 하나,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이 시국에 다음 일자리도 찾아보지 않고 나오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미쳤다고 하고, 누군가는 거짓말일 거라고, 다음 일자리를 찾아놓았을 거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쌩 백수다. 사 일째 같은 바지를 입고 보름 째 화장을 하지 않은 동네 백수 말이다.
회사를 나오면 신나게 여행을 다닐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좋았다. 질릴 때까지 잠을 잤고, 읽다 만 2020년 젊은 작가상을 단숨에 읽어내렸고, 대낮에 헬스장에도 갔다. 그 외에도 밀린 드라마를 봤고... 평일 낮에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사치까지 부렸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자 내 하루는 다시 단출해졌다.
아침 10시 기상. PT를 설렁설렁하고, 외주일을 하거나 빈둥거리는 걸로 하루를 가득 채웠다. 혼자 살기 때문에 PT 선생님이 아니면 온종일 한 마디도 안 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스멀스멀 우울이 밀려왔다. 김애란 작가 소설의 한 구절처럼,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이건 회사에 다닐 때와는 다른 우울함이었다. 불안. 그래, 불안이었다.
오후 2시, 남들은 회의하랴 미팅하랴 바쁠 시간에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찬 방에 누워 친구에게 카톡 했다. 나, 이제 뭐 해먹고 살지? 코로나 때문에 나보다 훨씬 먼저 백수가 된 그녀는 답했다.
뭐 해먹고 살지 보단,
뭐라도 좀 해먹으라고.
그러니까 뭐라도 해먹은 게 언제지? 정말이지 나는 집안일과 담을 쌓은 종족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내 집청소는 청소어플을 썼고 밥은 배달의 민족으로 해결했다. 그래서 둘러보니... 방 한켠에는 배달음식 용기가 한가득이었다. 뭘 해먹은 적이... 언제더라. 배달음식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온종일 불안해하는 일. 그게 퇴사 후 내 하루의 전부였다니.
며칠 뒤, 친구는 지하철 한 시간 거리의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그리곤 산처럼 쌓인 쓰레기를 치우고, 청소도 뚝딱 해주곤 유유히 돌아갔다. 그녀는 볕이 좋을 때 강둑을 걷고, 제철 과일을 깎아 먹으면 기분이 더할 나위 없어진다고 조언했다. 집에 초록색이 있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무신경한 성격의 나는 선인장마저 죽여버릴 것 같아 이케아에서 인조식물을 잔뜩 사서 눈에 보이는 곳곳에 두었다. 그리고 동네 홈플러스로 걸어갔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점심은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주 거르기 일쑤였으니까. 또 저녁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시켜먹는게 일상이었으니까. 어떻게 먹는가보다는 뭐라도 먹는게 중요했던 나날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한 박자 쉬고, 두 박자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 끼니마다 불 앞에 서본다. 내가 먹을 음식이니까 설탕은 조금, 계란은 왕창, 과일은 뽀득뽀득. 어른답게 모닝맥주도 콸콸콸.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아끼는 예쁜 그릇에 담아 한 상 차리고는 사진을 찍는다. 그리곤? 먹는다.
끼니를 잘 챙겨먹으면 내가 나를 챙기는 기분이 든다. 엄마가 그런 마음이었을까. 등교하려는 내 등 뒤로 ‘밥 먹고 가.’라고 소리치던 그 때. 그 순간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었을까. 그 시절을 떠올리자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회사를 다니는 동안의 나는, 나를 대체 어디까지 방치해둔건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게. 나는 남의 끼니는 잘도 걱정했으면서 왜 내 끼니는 챙기지 않았던걸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소중하다는 걸 왜 잊고 살았던걸까.
오늘 밤에도 나는 우산을 쓰고 동네 홈플러스로 걸어간다. 백수니까 마감 세일을 놓칠 수 없다. 내일 아침도 살뜰하게 챙겨야 한다. 하루의 가장 큰 과업이 끼니를 챙기는 일이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나를 대접하다 보면 그 밥심으로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끼니를 만드는 마음으로,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대접받다 보면 내버려둔 내가 다시 일어나서 뭐든 하지 않을까.
아직은 조금 쉬고 싶은 마음 반, 취업을 해야 겠다는 마음 반,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 지 모르겠는 마음까지 반. 딱 1/3씩의 마음으로 산다. 그걸 매일매일 살펴보면서 밥을 든든히 먹을 것이다. 나를 챙길 것이다. 그래서 서른 하나, 나는 요즘은 밥 먹는 일이 제일 재미있다고 말하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