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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Jan 22. 2020

우리 집이라 불렀던 공간들

한때 살았던 집에 가 보면 그 시절 내가 거기 있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빠의 규칙적인 전근 때문이었는데, 아빠의 커리어와 함께 우리가 사는 지역도 계속 달라졌다. 5학년 2학기 때 전학 간 곳이 내겐 세 번째 초등학교였다. 그렇게 세 번째 학교에서 졸업한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한 군데만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중학교 3학년 때, 5학년 때부터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이사 나가게 됐다. 부모님이 인근의 재계발 예정인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서 이사해야 한다고 했고, 이사 가서 잠깐만 살고 다음엔 넓고 좋은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갈 거라며 1~2년만 지내자고 했다.


초중고 학생이던 우리 삼 남매는 갑자기 지금 사는 집의 60% 크기의 좁은 집으로 이사 가야 한다는 게 실망스러웠지만, 크고 좋은 집에 살기 위해 2년만 참기로 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같은 동네에 있던 2층 주택이었는데, 1층에 주인집이 있었고 대문 앞엔 개도 키웠다. 개는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달려들어 다리 냄새를 맡고 핥으려고 했다. 개를 무서워하던 난 등하교 길마다 목줄이 유난히 긴 그 개가 내 다리까지 와서 닿지 않도록 한참 눈치보다 뛰어 나가곤 했는데, 등굣길 여름 하복에 신은 흰 양말을 핥아서 하루 종일 얼룩이 묻어있기도 했다.


그 집은 과연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상한 구조였다.


이사 갈 집에 먼저 가 본 언니가 설명하길, 현관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엔 안방이 있고 왼쪽엔 주방이 있단다. 그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고 방 두 개가 붙어 있으며, 거실은 없다고 했다.


"집에 어떻게 거실이 없을 수가 있어!"


살면서 거실이 아예 없는 집은 본 적이 없었다. 에이 설마, 거실이 있긴 있는데 좁은 거겠지, 했다. 이사 간 날, 언니가 설명했던 구조가 정확했음을 알게 됐다. 과연 언니 말대로, 집에 들어가자마자 양쪽으로 주방과 안방이 있었고 욕실과 나머지 방 두 개는 바로 옆에 붙어있어 그 사이에 짧고 좁은 통로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내 단짝 친구는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넓은 60평 동에 살았다.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는데, 네 가족이 사는 친구네 집은 어딜 가도 공간이 널찍했다. 안방은 전용 욕실을 두고 방 두 개가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방 두 개를 터서 친구와 오빠의 공부방으로 만든 방은 웬만한 오피스텔 크기였다. 거기다 친구는 개인 침실이 따로 있었다. 방과 방 사이도 넓고 거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관도 주방도 확 트여있었다. 이제 친구에게 우리 집에 오라고 하기도 창피했다. 결국 한 두 번 놀러 오긴 했지만, 그 친구도 아마 그런 집은 전에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올라갔고, 약속했던 2년이 한참 지났지만 우린 여전히 그 집에 살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꼬박 살고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우리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난 미국으로 왔고, 미국 생활도 이제 15년에 접어든다.


이제 평생 동안 한국에서 산 기간과 미국에서 산 기간이 똑같아지는 게 몇 년 안 남았는데, 지금도 나는 그 좁고 이상했던 구조였던 집에 사는 꿈을 꾼다. 한국에서 살던 때의 꿈을 꾸면, 배경은 늘 그 집이다. 꿈에서 그 집은 그때 모습 그대로 생생하다.


유난히 자주 꾸는 내용은 집 현관문이 잠기지 않는 상황이다. 위협적인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해서 황급히 문을 잠그려고 해 보지만 아무리 잠가도 문고리만 돌리면 문이 열린다. 공포스러운 상황에 집안에 나 혼자 있을 때도 있고, 가족들이 다 있을 때도 있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침입자는 무기를 가진 무시무시한 사람들인데 문을 잠글 수도 없는 것이다. 잠기지 않는 문을 잠가보려 애를 쓰다 잠에서 깬다.



지긋지긋한 꿈이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많은 집에 살았었는데 왜 하필 그 집만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더 좋은 집이 있었는데 말이다. 잔디밭 마당인 단독주택도 있었고, 새집도 있었고 넓은 집도 있었는데 왜 하필. 살았던 집 중 현관문이 가장 허술해서일까? 그 집에 살면서 도둑이 들거나 침입을 당한 적도 없는데 매번 그 집의 꿈을 꾼다.

우리는 어떤 공간을 떠날 때 우리의 일부분을 남기고 가기에, 그곳을 떠나도 우린 여전히 그곳에 있다. 우리 내면의 어떤 것들은 그 장소에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지난해 2년 만에 한국에 가서 우연히 그 집을 지나쳤다. 겉에서 보기에 우리가 살 때보다 더 낡아 있었고, 나름 여기저기 손을 본 듯해 보였지만, 분명 내부의 이상한 구조는 그대로일 것이다.


언니 차를 타고 그 집을 지나며 난 저 집이 그렇게 꿈에 나온다고 하니 언니는 그 전 전에 살던 집의 꿈을 꾼다고 했다. 거긴 언니가 중 2부터 고 2까지 살았던 집이었다. 언니는 어릴 때 꿈을 꾸면 늘 그 집만 나온단다. 그 시기가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인 걸까?


생각해보면 나도 그 거실 없고 구조가 이상한 집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내 평생 가장 작고 초라했던 집.


고등학교 입학, 졸업, 대학교 입학까지 그 집에서 했다. 거실은 없지만 각각의 방이 특별히 좁지는 않았다. 언니와 내가 쓰는 방 앞에는 넓은 베란다도 있어서 텃밭을 가꿔 파와 고추를 심어 먹기도 했다. 여름엔 돗자리를 깔고 고기를 구워 먹고 봄에는 평상에 앉아만 있어도 꽃향기 가득한 계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독서실에 가는 길에 피시방으로 방향을 틀어서 저녁 내내 놀다가 다시 돌아간 것도 그 집이었고, 연예잡지 학생기자로 뽑혔다고 연락이 와서 전화기를 붙들고 울먹였던 것도 추운 겨울 그 집 현관문 밖에서(가족들 없이 조용히 통화할 수 있는 공간이 거기뿐이라) 일어난 일이었다. 맹장수술을 받고 퇴원한 다음날 전신마취 때문에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도, 대학생이 된 언니가 롯데리아 알바를 시작한 날 가족들이 다 같이 언니를 데리러 간 것도, 아빠가 첫 차를 샀던 어느 봄날, 다섯 식구가 처음으로 다 같이 타서 긴장해 큰소리도 못 내고 대청댐에 드라이브를 다녀온 것도 다 그 집에서 살며 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 놀러 온 언니가 겨울에도 여름 같은 곳으로 여행 가고 싶다고 해서 플로리다에 다녀왔다.


마이애미가 있는 플로리다 남부는 1월 초에도 초여름 정도의 기온으로 온화한 날씨를 만끽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간 김에 내가 처음 호텔 인턴십을 했던 포트 로더데일에 가서 내가 살았던 집에 찾아가 봤다.

2층 우측이 내가 살았던 집. 스무 살 나의 일부분은 아직 이곳에 남아 있었다

약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아파트 단지는 그 사이 좀 더 깔끔하게 정비가 되었을 뿐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을 보고 있자니 그 시절 내 일부분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일을 끝내고 답답함에 울면서 집에 돌아가던 길, 오늘 일하며 머리로는 아는데 내뱉지 못했던 영어 표현들을 큰소리로 외치며 퇴근하던 일, 뉴욕 여행에 가기 전 일을 끝내고 전에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간 일, 한국 친구들을 사귄 후엔 매일매일이 즐거워졌던 기억까지. 그때의 수많은 감정과 기분들이 갑자기 훅 전해졌다.


거기에 남겨진 만큼의 내 경험과 추억과 청춘과 눈물은 아마 영원히 그곳에 남을 것이고, 그게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치 같았다. 상실감이 몰려왔다. 지금껏 내 인생의 모든 경험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그동안 살았던 수많은 곳들에 내 삶과 영혼의 일부분이 조금씩 흩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보니 나는 불완전했고, 내 삶은 몇몇 조각을 영원히 잃어버려 미완성으로 남아야 할 퍼즐판이었다.


'나 혼자 산다'에서 이시언이 청약이 당첨되어 넓고 좋은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그동안 살았던 집과 작별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나도 울었다. 같이 출연한 박나래를 비롯, 그 장면에서 울컥한 사람들 모두 비슷한 감정을 겪어봤기 때문에 공감한 게 아닐까.

좋은 집으로 가지만, 내 일부가 새겨진 집과 작별하는 건 여전히 서운하다

집은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를 보호하고, 매일 고단한 하루 끝에 돌아가면 품어주는 안식처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 때 안락함과 따뜻함을 주는 건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내 집 밖에 없었다.


몇 년간 그 공간에서 울고 웃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겪으며 살면서 우리의 손과 마음을 탄 장소엔 우리의 색이 묻어난다. 그렇게 집은 나의 색으로 물들어 내 일부가 되니 헤어질 때 서운하고 헛헛한 건 당연한 감정이다. 이사를 하는 건 단순히 공간과 헤어지는 게 아닌 거기서 산 시간 동안의 나와 작별하는 것이라, 이렇게 타지에 살며 중 이사를 할 때마다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소설가 세실리아 아헌(Ceclia Ahern)은 "집은 장소가 아니라 감정이다(Home isn't a place, it's a feeling.)"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한 도시에서 이사를 여러 번 했기에 가끔 예전에 살던 곳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집 근처를 한 바퀴 돌아보곤 한다. 그러면서 여기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 여기는 완전히 바뀌었네 하며 옛날 얘기를 나눈다. 나이 들수록 그렇게 예전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가 더없이 소중해진다. 몇 달 전엔 언니가 부모님과 함께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살았던 집 근처에 갔다가 그 집이 아직도 그대로 있더라며 사진을 찍어 보냈다.


집순이라 집에 집착하며 더 좋은 집을 찾아 옮겨다닌 끝에, 뉴욕에 있는 집이란 집은 다 보고 싶은 마음에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을 시작해서 5년 간 집 구경을 실컷 했다.


타고난 역마살 때문인 건지 난 어릴 때도 이사를 자주 했지만, 혼자 뉴욕 생활을 하면서도 집을 많이 옮겼다. 내 의지로, 때론 주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겨 다니다 보니 14년간 8군데 집에 살았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해서 옮기고, 주방에 쥐가 나와서 일주일 만에 이사를 나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한국인 룸메이트와도 살고, 고등학교 동창과도 살고, 외국인들과도 살았다. 거실을 옷장과 책꽂이로 막아 방처럼 쓰기도 했고, 가구가 있는 집에 몸만 들어간 적도 있으며, 친구네 거실 바닥에서 자며 몇 달을 지내기도 했다.


한때 우리 집이라 불렀던 공간들에 조금씩 남아있을 나의 조각들을 회상하고 기억하며 글로나마 남기고 싶은 마음에 새 매거진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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