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다 뚜렷한 "음식"이라는 타임머신
결혼 전 한인타운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면 남편은 언제나 떡만둣국을 시켰다. 삼겹살이나 갈비를 먹어도 마무리는 된장찌개, 냉면이 아닌 떡만둣국이었다. 설렁탕 맛집, 순두부 전문 식당에 가도 그의 선택은 한결같았다.
얼큰하고 진한 맛을 선호하는 나는 허연 떡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도 설날에 딱히 내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먹었고, 그마저도 떡은 최소한으로 몇 개만 담아 만둣국처럼 먹었다. 두부나 떡국같이 허옇고 싱거운 음식은 싫어하는 난, 설날도 아닌데 허구한 날 떡국만 시키는 그가 신기했다.
“왜 그렇게 떡국을 좋아해?”
“어릴 때 집에서 자주 해 먹은 음식이라서.”
남편은 초등학교 3학년쯤 미국에 입양되었다. 일반적인 입양아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미국에 온 만큼 입양 전 한국에서의 기억이 꽤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가 해 주신 많은 음식들 중 만두를 넣은 떡국이 유난히 생각난단다. 담백한 음식을 선호하는 그의 취향도 한몫하는 듯하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떡만둣국을 집에서 자주 만들게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우리 집 냉동실에는 떡국 떡과 만두가 늘 구비되어 있는데, 남편이 찾는 만두는 왕만두였다. 크기가 클수록 좋아했고, 식당에서 떡만둣국을 시켰는데 조그만 만두가 들어있으면 실망했다. 하지만 슈퍼에서 이런저런 왕만두를 사다 먹어봐도 "그래, 이 맛이야" 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찾는 맛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괜찮다, 애써 맛있다고 하는 느낌이었다.
그의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다는 왕만두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재료를 썼으며 무슨 맛이 났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맛을 또렷이 기억하지도, 재료의 느낌을 설명하지도 못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크기가 워낙 커서 한 그릇에 두세 개 정도 들어가면 가득 찼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그렇게 큰 만두가 있단 말이야?
한국에 갈 때마다 동네에서 여기저기 만두 잘한다는 집에 가서 왕만두를 사 먹어봐도 "으응 맛있네" 정도지, "그래 이 맛이야"라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만두는 점점 흐려지고 있던 걸까.
"할머니의 개인적인 비밀 레시피가 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호기심이 강한 나는 도대체 어떤 지역 풍의 만두였는지 궁금했다. 할머님 출신 지역은 모르지만 다양한 만두 스타일을 찾아보면 알아내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우리나라 만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만두 중 하나인 자오쯔(餃子)의 영향을 받았는데, 한반도에서 만두로 가장 유명했던 지역은 북한의 개성이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개성에서는 설날에 만두를 먹었고 서울에서는 떡국을 먹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북부에서는 만두가, 남부에서는 떡국이 명절 음식이었던 것이다. 지리적 영향인지, 남과 북 중간인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떡과 만두를 모두 넣은 떡만둣국을 설날 음식으로 먹게 되었다. 이북식 만두 중에서도 평양식 만두는 크기가 어린아이 주먹만큼 크고 속이 가득 들어가서, 큰 그릇에 서너 개만 넣어도 가득 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거구나.
서울 태생인 남편은 만두에 있어서만큼은 나와 전혀 다른 음식 문화권에서 자란 것 같았다. 만두 서너 개만 넣어도 국그릇이 가득 찼다는 건 아직 어렸던 그의 왜곡된, 혹은 과장된 기억인 줄만 알았다. 남편이 아무리 자기 주먹만 한 만두였다고 해도 "에이, 만두 세 개 넣는 만둣국이 어딨어!" 했다. 서울과 대전은 고속열차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나는 평생 살며 그런 음식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지난여름 모처럼 한국에 갔을 때 꼭 하기로 했던 게 서울에서 이북식 만두를 먹어보는 거였다. 한인이 많은 뉴욕, 뉴저지에서도 찾을 수 없던 이북식 만두를 내는 집이 서울에는 꽤 많이 있었다. 냉면이 유명한 이북식 음식점에서는 대부분 평양식 손만두도 선보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촌동생 가족과 만나는 날, 메뉴는 우리를 위해 이북 음식으로 정해졌다.
3대 평양냉면 집 중 하나라는 장충동의 식당에 들어서니 과연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았다. 꽤나 고가의 음식점인 것에 비해 내부는 소박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관광객들도 꽤 찾는 곳인지 옆 테이블에서는 단체 손님들의 영어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 드디어 그의 어린 시절 맛을 볼 수 있을까? 미지의 맛에 대한 설렘과 기대치가 최고조에 달했다.
푸짐한 어복쟁반이 먼저 나오고, 이윽고 만두도 나왔다. 과연 한 접시에 여섯 개 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진짜 큰 만두구나." 내가 생각했던 둥근 왕만두 모양이 아닌 반달 모양의 큼직한 만두가 투박하게 담겼다. 한 입을 베어 문 순간 "어? 이게 뭐야?" 싶었던 것이, 속에 두부만 가득 차 있는 듯한 맛이었다. 고기 향도 거의 나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심심한 맛이었다.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온 남편도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미 "이거다"하는 환희의 감정이 피어났다. "그때 그 맛이야?" 물으니 연신 끄덕이며, 할머니가 해주신 딱 그 만두 맛이라고 했다. 그 시절 일상처럼 먹던 할머니 만두를 다시 맛보기까지 3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씹을수록 두부와 고기의 고소한 맛이 은은하게 퍼졌다. 부드럽고 폭신한 만두소였다.
나를 비롯해 같이 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맛의 이북식 만두가 남편에게는 흐릿해진 기억마저 또렷하게 일깨워주는 익숙한 맛이라는 게 신기했다. 우리가 어복쟁반을 먹고, 담백한 평양냉면에 식초를 넣니 겨자를 넣니 하며 화기애애한 와중에도 남편은 정신은 온통 만두에만 가 있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나 시끌벅적했던 그날 저녁, 내 앞에는 성인 남자가 아닌 할머니 왕만두를 맛있게 먹는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반년 뒤 누나와 함께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불과 몇 달만에 이역만리 미국으로 입양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도 못 했을, 말 안 듣고 철없는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 아들을 병으로 잃은 후 두 손주를 눈물로 고아원에 보낸 할머님은 그 시절 사진 속에 이미 많이 늙으셨었다.
그리운 할머니 만두 맛을 찾아 손자는 수십 년 후 미국의 한식당에 갈 때마다 만둣국을 시켜 먹었다. 이국의 떡만둣국이 조금이나마 그를 보듬고 위로해줬을까? 할머니가 해주신 다른 음식들도 많았지만, 만둣국은 유난히 행복했던 기억이 담긴 음식이었다. 할머니를 도와 만두를 빚고, 다 같이 끓여 먹었던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긴 외국생활 끝에 한국말도 잃어버린 그에게 만둣국은 어린 시절 행복했던 날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자 지금도 만날 수 있는 그 시절의 유일한 실체였다. 흔적도 그의 한국에서의 따뜻한 기억을 느껴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떡만둣국을 먹었을까. 큼직한 만두를 몇 개나 먹어치운 먹은 후 세상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눈에 감동과 그리움이 차올랐다.
그날 이후 또 다른 이북식 만두집을 두 군데나 더 찾아가 먹어보니, 확실히 일반적인 만두와는 재료의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맛본 세 종류의 이북식 만두에는 하나같이 당면과 부추가 들어있지 않았다. 부드럽고 매끈한 질감의 당면과 특유의 알싸한 향과 씹는 맛을 보태는 부추가 없이 고기와 두부, 숙주나물 정도가 만두소의 전부라 맛도, 씹는 질감도 심심했다. 그중에는 씻은 김치가 들어있는 곳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달고 짠맛이 최소화되고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극대화된, 폭신하면서 적당히 묵직한 만두소가 이북식 만두, 바로 어린 시절 그가 먹고 자란 할머니표 왕만두의 특징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음식과 음악이 나름의 타임머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희미해진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비밀번호처럼, 한때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잊고 지냈던 그때의 감정들까지 되살아나고, 어떤 음식을 먹으면 기억 속의 느낌과 분위기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종종 만나는 그런 상황에 열광한다. 어릴 때 먹었던 것과 비슷한 맛을 보면, 그때 그 맛이다, 옛날 생각난다며 흥분하고 즐거워한다. 그래서 소울푸드, 영혼을 달래주는 음식이란 말이 있나 보다.
나에게도 분명 추억을 되살려주는 음식들이 있다. 찹쌀순대를 먹으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서 처음 순대를 맛봤던 따사로운 토요일의 기억이 떠오른다. 불고기 김밥을 먹으면 초등학교 소풍 때 친구 김밥을 먹어보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놀랐던 마음이 떠오른다. 햄을 먹으면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와서 친구네 집에 놀러 갔던 날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이후로 햄을 수 십 년 먹어왔지만 지금도 햄을 보면 떠오르는 건 처음 먹었던 날의 짜릿한 느낌이다. 시골에서는 소수의 세련된 엄마들이 김밥에 넣는 게 햄이었는데, 도시에 오니 큼직하게 썰어서 접시에 쌓아놓고 케첩에 찍어 먹고 있는 게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햄은 지금까지도 '도시 아이들의 맛'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맛의 기억은 색깔도, 향기도 바래지 않은 채 영혼 깊은 곳에 저장된다. 그런 하나하나의 기억이 쌓여 나라는 사람의 취향과 감성을 만들어 낸다.
내 추억의 음식들은 쉽게 구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대부분인데, 남편에게 소중한 시절의 맛은 기억 속에만 있을 뿐 좀처럼 실체를 찾을 수 없는 맛이었다. 같이 찾아주려고 해도 쉽지 않았던 그의 흐릿한 기억 속 할머니 왕만두를 장충동의 이북 음식점에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두부, 돼지고기, 숙주나물과 왕만두용 크기의 넓은 만두피. 미국에서도 흔한 재료들이라 구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내 입맛이 아니라는 핑계로 한 번도 만들어 볼 생각은 못했다. 올해는 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질 때쯤 서프라이즈로 이북식 만두를 많이 빚어서 얼려두고 겨우내 남편의 소울푸드인 이북식 떡만둣국을 끓여 먹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