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정아 Dec 26. 2020

엄마와 여행사 언니

엄마는 모퉁이 여행사 사무실에 늘 먹을걸 싸들고 갔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동네엔 스포츠센터가 있었다. 실내 라켓볼 연습장도 있고 수영장도 있어서 6학년  친구들과  5 수영 강습이 끝나면 1 롯데리아에서 불고기 버거로 배를 우던 스포렉스 빌딩이다.  건물 1층에 여행사 분점이 있었는데, 분점이라고 해봤자   평도  되는 계단  공간을 막아 만든 곳이었다. 에버랜드나 롯데월드 입장하기  들르는 티켓부스 사이즈,  그만한 크기의 사무실이었는데, 본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곳엔  부스만 있었다.


인터넷 발매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기차표 예매를 그곳에서 했었다. 거기가 아니면 기차역에나 가야 표를 살 수 있는데, 역보다는 그곳이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 집도 기차를 탈 일이 있으면 그곳을 이용했다.


그 부스엔 직원 한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유니폼을 단정히 입은 언니였다. 엄마는 특히 그 여행사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당시 기차 탈 일이 그렇게 많았던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마는 한 달에 두세 번씩은 그곳에 가서 표를 예매하곤 했다.


엄마는 표를 사러 갈 때 한 번도 빈손으로 가는 일이 없었다. 집에 들어오는 과일이나 쿠키, 떡 같은 걸 조금씩 덜어 담아 가지고 가거나 장을 보러 갔다 맛있어 보이는 걸 따로 사서 가지고 갔다. 표를 살 때는 물론이고, 표를 살 일이 없는데도 괜히 먹을 걸 사다 갖다 주고 인사를 하고 오기도 했다.


"아가씨가 다른 직원도 없이 혼자 거기 일하는데 얼마나 심심하겠냐."


하시곤 했는데 지금 보면 그 언니는 아마 그렇게 혼자 일하는 게 오히려 성향에 맞았을지도 모르는 게, 그곳에서 꽤 오랫동안 직원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그 유니폼 입은 여행사 언니는 계속 그 자리에서 혼자 일했다.


가끔 나나 언니가 표를 사러 갈 때에도, 엄마는 "엄마 딸이라고 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니 거기 오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그냥 엄마 딸이라고 하면 알까 싶었지만, 실제로 "음... 저희 엄마가요..."라고만 입을 떼도 그 언니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기차표를 구하기 어려운 연말이나 설날, 추석 때에도 우리는 늘 어떻게든 좌석이 있는 기차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여행사 직원의 파워가 그렇게 대단한 거였던가. 역에서도 매진이거나 입석밖에 못 구하는 상황에도 그 언니에게 부탁해서 표를 살 수 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엄마는 병원에 갈 때에도, 물리치료나 침을 맞으러 갈 때에도, 한번 이상 간 곳이라면 두 번째부터는 뭔가 주전부리들을 꼭 가지고 갔다. 집에 있는 것들 중 가장 맛있고 새로운 것들로, 없으면 사서 들고 가는 일도 있었다.


늘 엄마 심부름으로 여기저기 음식이나 간식들을 배달하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받는 입장이 되어서야 그런 작은 행동들의 진가를 깨달았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여기저기서 일을 해보니, 내가 일하는 학원이나 사무실에 오는 손님들이 간식을 사 오시면 그게 그렇게 소소한 즐거움일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니어도, 바로 길 건너에 파는 흔한 붕어빵 한 두 개라도, 정말이지 지루한 업무와 지친 오후 한줄기 빛처럼 느껴지고 달콤한 휴식의 시간 그 자체였다. 아, 이래서 엄마는 그렇게 여기저기 먹을 것들을 갖다 주며 인사하고 친해졌구나. 그걸 받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이었겠구나 하며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여기저기서 선물이 많이 들어오곤 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빠의 학부모들, 예전 제자들과 예전 학부모들까지 명절이면 사과나 배 같은 과일들, 참치캔 세트 같은 걸 보내주곤 했다. 과일이 한 상자 들어오면 엄마는 상자를 열어 제일 상태가 좋은 것들로만 두세 군데 옮겨 담아 앞집 옆집에 보냈다. 하지만 과일 한 상자가 완벽한 것들로만 채워질 수는 없는 법. 맨 아래 깔려있거나 가장자리에 있어서 배달 중에 찌그러지고 흠이 있는 것들은 우리들 몫이었다.


"아 왜 우리는 맨날 썩은 것만 먹어." 라며 불평한 일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제일 좋은 것들로만 줄게 아니면 아예 안 주는 게 낫다는 게 엄마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늘 들어온 과일이나 음식들 중에서 모양이 안 예쁜 것들 위주로만 먹었고, 그런 건 지금에 한국 집에 방문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 처음 올 때나,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갈 때마다 나를 반겨주시고, 시장에서 복숭아가 포도가 싱싱해서 한 상자씩 사서 보내주시는 것도 모두 엄마의 친구들이다. 평소 나눠준 이상으로 우리가 받고, 남에게 베푼 것 이상으로 우리가 복과 운을 받아 건강하다는 게 엄마의 신념이자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미국에 와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센터에 드나들며 인턴십을 찾던 시절 나는 늘 먹을 것들을 사들고 갔다. 컵케익을 사기도 하고, 요즘 핫한 도넛 집에서 가장 큰 상자 가득 사 가기도 했다. 내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지만 그곳에 오는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 손님들보다 더 근사한 간식들을 사가거나 하면 받는 입장에선 늘 놀라워했고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한국 이상으로 인맥이 중요한 미국, 내겐 인맥이라는 게 전무후무한 미국 팝 음악 시장에서 조금씩 인맥을 만들어 나갔고, 늘 생각보다 운이 잘 풀려 점점 더 내가 원했던 곳에 갈 수 있었다.


결혼 후 남편은 내가 친구들에게 뭔가를 퍼 줄 때마다 불만이 많았다. 우리가 먹으려고 만든 음식들을 반이나 퍼주면 우린 뭘 먹냐는 그의 표정은 어릴 때 엄마가 성한 과일들만 골라 옆집에 보낼 때 내 얼굴과 비슷했다. 그러면 그때의 엄마가 하던 얘기들을 남편에게 그대로 해주곤 했다. 결혼 초기엔 불만이 많았던 남편도 이제는 많이 단련되고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성공이라는 건 절대로 혼자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이란 나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들이 모여서 이뤄내는 것이란다. 나는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그렇게 했고, 부동산 중개인을 할 때에도 거래가 성사된 이후엔 늘 고객들께 거래 금액 대비 기대 이상의 선물을 하곤 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사업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게 번창하거나 거래가 끊임없이 성사된 건 아니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더더욱 얻은 것의 일부를 아낌없이 돌려주는 데 익숙해졌다. 그렇게 살아온 방식이 나라는 사람의 그릇을 점점 키워주고 있다고 믿는다.


늘 내가 기꺼이 조금씩 손해 본다는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다 보면 점점 큰길이 열린다는 게 엄마의 가르침이었다는 걸 나이들수록 깨닫는 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