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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Apr 09. 2021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잃어보니

세상 문제의 90%는 돈으로 해결된다고 했는데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잃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얼마 전까지도 대부분의 문제는 돈으로 다 해결된다고 믿었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는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다.


"나 홀로 집에"란 영화가 인기를 끌고난 후 주인공이었던 맥컬리 컬킨이 출연한 리치 리치(Richie Rich)라는 영화가 있었다. 


비디오 가게에서 아메리칸 홈 무비를 빌려다 보는 게 삶의 낙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에 봤던 그 영화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인 리치의 부모님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 사업가였는데, 그 회사의 CFO가 리치 패밀리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재산을 훔칠 계획을 세웠다. 결국 그는 리치 부부와 리치를 앞세워 패밀리 금고에 당도하는데, 거대한 자산이 숨겨져 있을 줄 알았던 금고에는 가족사진, 오래된 트로피 등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 뿐이었다. 

집안에 무려 맥도날드와 놀이동산이 있던 억만장자 리치 가의 패밀리 금고에는 실로 대단한 보물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며 갈등이 고조되었던 차였다. 영화의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는데, 금고에 금은보화가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나조차 그 장면에서는 황당하고 허탈해하는 악당의 마음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겨우 저런 오래된 트로피와 사진들을 저렇게 대단한 금고에 보관하다니. 그리고 "이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라며 추억에 젖는 리치 부부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이해가 안 갔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세상 문제의 90%는 돈으로 해결된다고 어느 자산가가 말했던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성인으로서 내 머릿속에 그보다 확실하게 새겨진 말은 없었다.

멀쩡하던 노트북이 예고도 없이 망가지기 전까진.


그날까지도 멀쩡하게 작동하던 나의 맥북프로는 2011년 초에 구입한, 한 달 후면 10년 차에 접어들 골동품이었다. 이걸 처음 샀을 때만 해도 노트북이란 2년에 한 번씩 업그레이드해줘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결혼 후 "물건은 오래 써야 한다"는 남편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어느새 9년 넘게 쓰고 있었다.


유튜브를 시작하고 매일 영상편집을 한다고 열 일 한 지 딱 일 년이 되던 시점에 노트북은 예고도 없이 꺼졌고, 다시는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애플 스토어에 예약해서 지니어스와도 상담을 해 봤지만 9년 된 골동품 앞에서 지니어스도 손을 쓸 수가 없었고, 결국 묵직한 15인치 맥북을 다시 챙겨 조용히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던 이유는 지난 며칠 내내 편집했던 완성본 영상을 날려서라기 보다는, 지난 10년 넘게 찍었던 사진들을 다 잃은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남는 건 사진 뿐이랬는데. 사진만 지키면 다른 파일은 다 잃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사진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디카를 구입했을 때부터 찍었던 20대 초반의 사진들. 뉴욕에 유학 오던 날 부모님이 인천공항에 데려다주며 같이 밥을 먹고 찍었던 사진들. 화장끼 없는 20대 초반의 나와 아직 젊고 탱탱한 50대 초반의 엄마 아빠. 그 사진들만 다시 복구할 수 있다면 다른 파일이나 서류들은 다 잃어도 상관없었다.


평소 노트북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도 별로 찾아볼 일도 없던 수 천장의 사진들이 순간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던지.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그 사진들을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렸다. 만약 사진 파일들이 복구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내 기억 속에서 하나씩 영원히 사라져 버릴 터였다. 내 지난 20년 가까운 기억들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 숨이 막혀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보물인지 몰랐던 나의 개인적인 보물은 모두 9년 된 내 노트북 안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한 번도 내 사진들을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그것들을 잃게 된 시점에야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스물두 살에 처음 해외여행에 가서 찍은 촌스런 내 사진 한 장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게 현실이었다. 

우리는 분명 돈으로 살 수 없는 개인적인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

문득 리치리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낡은 골동품, 오래된 트로피와 빛바랜 물건들이 억만장자 리치 부부의 가족 금고 안에 여러 겹의 안전장치의 튼튼한 보호 속에 보관되어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무려 1994년 작 영화의 그 장면을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 2021년에 마음속 깊이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우울한 기분으로 새 노트북이 오기까지 두 달을 지내며 마음을 비워갔다. 혹시나 백업 드라이브에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면 여기저기 흩어진 USB 드라이브에 남은 사진이라도 모을 요량으로 서랍에 있던 USB들을 하나씩 찾아뒀다.


긴 기다림 끝, 두 달 여 만에 새 노트북이 도착했고, 새 노트북을 받자마자 한 건 백업 드라이브를 작동시키는 일이었다. 일 년도 넘게 백업을 하지 않아서 그 사이 업데이트된 부분들은 모두 날렸지만, 내가 생각했던 오래된 사진들은 다행히 복구가 가능했다. 예전 노트북이 워낙 오래되고 백업 또한 오래돼서 복구 과정이 수월하진 않았지만 가까스로 모든 사진들을 찾아 저장했고, 불안한 마음에 수천 장의 사진을 두 군데에 더 저장해 두니 든든해졌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사진이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오래된 내 티셔츠를 입고 있는 엄마와 엉거주춤 서 있는 아빠는 이때만 해도 아주 젊었구나.


개인적으로는 "수시로 백업"이라는 현대인의 필수 가치를 일깨워 준 경험이지만, "세상 90%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된다."라고 생각했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준 사건이었다. 


돈으로 해결되는 90%의 문제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나머지 10%의 문제를 처음으로 마주한 느낌이었다. 우리에게 진짜로 소중한 것들은 생각보다 사소하고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하면 우리가 매일 느끼는 감정과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 보내는 이 시간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일 수도 있다. 


무심코 찍었던 사진들이 훗날에 절절한 보물처럼 느껴지듯이,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만날 수 있고 지금 톡으로 대화할 수 있는 가족과의 시간과 경험을 더 소중히 대해야겠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이기에. 실제로 요즘은 매일 아픈 데만 없어도 감사하고, 큰 고민거리만 없어도 더없이 행복한 삶이라고 느껴질 정도니, 갑자기 고장 난 노트북은 순식간에 잃었지만 더 큰 걸 얻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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