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챗쏭 Apr 07. 2020

술에 기대 울어 본 적 있는 이에게

「아무튼, 술」김혼비 




2009년쯤, 어느 겨울

사실, 정확하게 어느 때였는지,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겠다.

다만,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추운 날이었고 깜깜한 밤이었다. 정신을 잃을 만큼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터벅터벅 걷다가는 발이 이처럼 무거운 것이었나를 느끼며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나는 고개를 들어 집을 한 번 쳐다봤다. 불은 꺼져 있었다.


깜깜한 밤, 불 꺼진 집... 그보다 더 칠흑 같던 것은 내가 서 있던 자리였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군대를 전역하고는 다시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6개월을 학교 고시반에 가 있었다. 그 사이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절체절명'이라는 말, '절벽 위에 서 있다'는 말보다 내 처지가 더 절박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별안간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는 한참을 울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을 기억의 저편에서 뒤져 꺼내왔지만, '술에 취해 울었다' 말고는 앞뒤의 어떤 기억도 없다. 누구와 무엇 때문에 술을 마셨는지, 어떻게 집에 들어가서 다음 날 어땠는지, 오래된 기억이라지만, 단지 기억나는 것은 '술에 취해 울었다' 뿐이다.


그날의 술이 나를 건져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서는 기분이 후련해져서 앞길이 훤히 보였다거나, 술기운에 어떤 귀인이 나타나 나의 길을 가르쳐주고는 홀연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으며 책을 접었고, 배운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계유지를 위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선가 나는 그렇게 '술에 기대어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책을 덮고는 아무런 안주도 없이 오래된 기억을 꺼내어 술 한 잔 마셨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 지곤 했다. 
.... 
세상에 "힘내"라는 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아무튼, 술」김혼비, 60쪽



'마음이 술렁이던 기억'

그 후로도 여태까지 나의 술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술의 양과 빈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십 대 혹은 삼십 대보다 술을 마실 경제적 사정도 조금 더 낫고, 술을 마시자고 꼬시는 사람들도 많고, 더욱이 술을 마실 일, 술을 마셔야만 할 사정이 더 많으니, 아마도 젊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술을 마실 게다. 하지만,  만일, '술 마시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측정해 볼 수 있다면, 글쎄,  오히려 '에이, 차라리 술을 끊자'  싶을 만큼 틀림없이 그래프는 바닥을 기어가고 있을 것이다.


마음 놓고 술을 마셨던 기억은 언제였을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맘껏 취했던 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취함'의 경계도 잊은 채 그렇게 마셨던 날, 그랬던 날,

마음이 편해져서, '그래, 이럴 땐 술 한 잔 해야겠다' 마음먹었던 때는 또 언제였을까.

'이 사람과는 늘 술 한 잔 하는 일이 즐겁다' 하는 사람,

시작부터 끝까지 하이 텐션에 고정한 채로 정신없이 웃고 떠들며 

술잔을 내려놓을 틈 없이 함께 했던 이는 누구였던가.


생물학적인 만취가 불러오는 여러 결과 중에 주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고려하면, 
주사는 싫든 좋든 술꾼을 이루는 필연적 구성 요소겠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내가 정해놓은 주사의 경계 안에서만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다. 
어쩌면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어서 경계를 정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뚜렷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중력의 영향권 안에서 허공을 날 때는 자유롭지만, 
무중력 상태가 되면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한 채 단지 허공에 떠 있을 뿐인 것처럼. 

「아무튼, 술」김혼비, 45쪽




내가 술기운에 가장 많이 누른 전화번호

아내도 알지 못하는 첫사랑, 혹은 남몰래 짝사랑했던 그녀...

JTBC의 어느 드라마에서는 그럴지 모르겠으나...

내가 술을 마시고 가장 많이 전화한 사람은 친구 녀석 준범이다.


이유가 있다.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 시간은 밤늦은 시간이 보통인데, 많은 사람들의 주사가 그렇듯, 술자리의 여운도 남고 더 할 얘기도 남고, 또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을 때, 그런 내 마음을 받아주는.... 아직 자고 있지 않으며 편하게 전화받아줄 수 있는 친구가 준범이었다.(미안하다. 친구야~)


제정신이라면 전화하지 않을 시간, 취하지 않았으면 꺼내지 않을 속내, 매번 걸려오는 시간만 봐도 한눈에 '이 녀석 또 술 한 잔 했군' 했을 텐데, 단 한 번도 귀찮은 목소리가 없었다.(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이 친구와 술 마시는 일도 참 즐거운 일이라서 우리가 만나 술자리를 하는 동안의 이야기 주제를 꼽는다 하면 손가락 열개, 아니 노트 한 장으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가족, 직장, 친구(보통은 그 자리에 없는), 야구, 여행, 정치, 책, 영화, 음악, 연예인(내가 가장 취약한), 삶의 계획, 아파트 청약, 마이너스 통장 사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쉬지 않고 떠든다. 


언젠가부터 이 친구에게 술을 마시고 전화하는 일이 미안해졌다. 전화를 할 때는 신나고 즐겁고 또 고맙지만, 술이 깬 다음 날이면 눈 뜨자마자 후회하는 일이 이렇게 '술 마시고 한 전화'였다. 준범이에게야 아무 때나 전화할 수는 있다지만 술기운에, 밤늦은 시간 전화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만큼 술을 조절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문득 내 나이를 가늠한다.


뭉툭한 연필심은 끄떡없듯이,
같이 뭉툭해졌을 때에서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고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나의 오랜 술친구들과 미래의 술친구들과
오래오래 술 마시면서 살고 싶다.
너무 사소해서, 너무 유치해서, 너무 쿨하지 못해서, 너무 쑥스러워서, 혹시 기분 상할까 봐, 관계가 틀어질까 봐, 어색해질까 봐 같은 계산 다 던져버리고 상대를 믿고 나를 믿고 술과 함께 한 발 더.

그러다 보면 말이 따로 필요 없는 순간도 생긴다.
그저 술잔 한 번 부딪히는 것으로,
말없이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전해지는 마음도 있으니까.

 「아무튼, 술」김혼비, 169쪽


이렇게 쓰고 나니, 또 어찌 술 한 잔 안 할 수 있겠는가.

나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소리'가 있는데.


"소주 오르골" 

술에는 맛도 있고 향도 있지만 소리도 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똘똘똘똘똘똘똘똘.

소나기 아래서 빗물을 빨아들이는 나무의 요정 같은 소리가 테이블 위로 잔잔히 퍼졌다.  

「아무튼, 술」김혼비, 35쪽




매거진의 이전글 떠날 수 없는 일상 속에서의 여행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