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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챗쏭 Aug 25. 2019

‘김훈’이라는 사람의 글

[서평 혹은 감상문] '연필로 쓰기', 김훈, 문학동네



“연필”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렇다.


내가 연필을 쓰기 시작할 무렵, 할아버지는 새마을칼이라고 불렸던 검정 면도칼로 정성스레 연필을 깎아 주셨다. 왼손으로 연필을 쥐고 면도칼등을 오른손 엄지로 천천히 밀어 돌리면서 깎으셨다. 한 자루 한 자루 어찌나 정성스러운지 연필 밥이 수북이 쌓일 동안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 경건한 작업을 지켜봤다. 지금이야 자동 연필깎이부터 손쉽게 손잡이만 돌리면 되는 연필깎이며 온갖 도구들이 많으니 옛이야기일뿐이다. 더욱이 '연필’ 자체를 쓰는 사람이 흔치 않다. 그러니 ‘연필을 깎는다’는 말은 박물관에 박제된 말일테지만 내게 ‘연필’은 그런 오래된 추억이 묻은 필기구다.


지우개는 또 어떤가. 밥상을 펴 놓고서 연필로 공책에 숙제를 하다가 글자가 삐뚤빼뚤하거나 잘못 써 놓거나 하면 어김없이 엄마의 지우개가 나타나 벅벅 지워댔다. 지금처럼 질 좋은 지우개도 아니니 공책은 금방 너저분해졌고 밥상은 지우개 밥으로 수북했다.

     

나는 지금도 사무실 연필꽂이에 연필 몇 자루를 놓고 손쉽게 꺼내 쓰고 있고 자그마한 연필깎이도 마련해놓았다. 연필이 있으니 지우개도 당연하다. 생각보다 자주 쓰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역할을 한다.






작가는 여전히 연필로 원고지를 채워나간다고 했다. 손만 닿으면 자판을 두드릴 수 있고 자판이 아니라 해도 손가락으로도 얼마든지 문장을 써 나갈 수 있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그의 밥벌이는 연필로 시작하고 연필로 끝이 난다.  그의 글을 해독(?)하는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그의 글자를 읽히느라 애를 먹는다고 하니 연필로 쓰는 그의 고집은 보통이 아닌 듯하다.


김훈 작가의 책은 늘 그렇게 어떤 느낌에 끌려 집어 들게 되는 묘한 마력이 숨어 있다. ‘칼의 노래’(2001년)로 시작해서 ‘자전거 여행’(2000년)을, ‘남한산성’(2007년), ‘라면을 끓이며’(2015년)도 읽었다. ‘읽게 되었다’라고 쓰고 싶을 만큼 나는 그의 책, 그의 글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마저 갖고 있다. 어쩌면 ‘읽어야 했다’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글은 늘 닮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읽어야 했다.

   

한 번은 이국종 선생의 ‘골든아워’를 읽다가 “김훈의 글 냄새”를 느끼고는 ‘이 양반도 어지간히 김훈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한 적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국종 선생도 늘 머리맡에 ‘칼의 노래’를 두고서는 수도 없이 읽었다고 했다. ‘골든아워’는 마치 김훈 작가가 손 본 것처럼 그의 문장이 짙게 배어 있다.


그의 글은 에둘러 돌아가는 법이 없다. 문장은 명쾌하고 담백하며 단정하다. 빗대어 이야기하지 않고 온갖 수식어로 포장하지 않는다. 길게 이어 붙이거나 모호하지 않다. 하얀 백지를 한칼에 베어내는 무사의 칼처럼 그렇게 한 획으로 읽힌다.


그의 글에는 날 것 그대로가 드러나 있다. 그의 문장에서는 투박하지만 정직한 삶의 순리가 담겨 있다. 글로 한껏 포장한다 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기껏해야 ‘먹고 싸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문장은 일관되어 있다.






34개의 꼭지 글을 3부로 구성한 이 책은 그간 그가 쓴 신문의 칼럼을 다시 썼거나 오래전 쓴 글을 다시 만져 담은 글이다. 흔히들 쓰는 ‘작가의 말’과 같은 긴 서문 하나 없이 “알림”이라며 시작하는 몇 줄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단정한 마음을 먹게 한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 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히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외려 읽는 이에게 알리는 글이 아니라 쓰는 이가 어떠한 마음이어야 하는가를 알리는 듯했다. ‘그래, 글을 쓴다는 것은 이래야 하는구나’ 하는 그런 것.

    

1948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일흔이 넘은 노작가의 이 같은 말은 한편으로는 궁금하게 만들었다. 어떤 글을 썼길래 그럴까 하고.      

그가 사는 일산의 호수공원에 가서 그는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본 글을 쓰기도 하고 ‘밥과 똥’이라며 “똥”에 관한 이야기를 오래 읽도록 길게 썼다. 죽음에 대하여 혹은 삶에 대하여 그는 담담하게 글을 썼다.     

‘칼의 노래’에 미처 다 담지 않은 이야기처럼 이순신에 관하여 썼다. 마치 ‘칼의 노래’ 감독판인 것처럼, 작가는 어떠한 해석도 없이 “풍경과 표정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이야기한다.(98쪽)  앞서 나는 그의 글을 닮고 싶다고 썼지만 작가는 ‘이순신의 글’을 닮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차가운 문장 속에 슬픔은 침묵으로 가라앉은 글(99쪽)”을 그는 ‘칼의 노래’로 썼고, 그런 그의 글은 여전하다. 이순신의 침묵은 삶을 향한 전환을 예비하는 침묵이었다고 그는 썼지만 나는 작가의 글에서 종종 그런 전환의 침묵을 느낀다.      

그가 말한 ‘풍경과 표정으로 남기는 글’은 역사뿐이 아니다. 그는 세월호 3주기를 맞아 동거차도와 서거차도, 팽목항을 오가며 보고 느낀 것들을, 세월호 4주기에 만난 유가족의 삶을 “풍경과 표정”으로 남겼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글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로의 전환이 만져졌다.


일흔이 넘은 노작가는 종종 죽음을 이야기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전선의 유골과 구멍 뚫린 수통에서, 혹은 버려진 폐교장의 이승복 동상에서. 삶과 죽음을 ‘정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며 낮춰 말한다.






혹여나 작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그럴리는 없겠고) 서운하겠지만 나이 든 노작가의 글은 예전처럼 날 서 있지 않았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사이를 오가던 그의 깊은 고민의 예민함은 사라졌고, 이제는 그런 고민조차 굳이 따질 필요 없는 삶의 통찰이 글 속에 있다. 그럼에도 무뎌진 칼의 무게는 조금 벅찬 듯 보였다. 그 또한 삶의 순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읽는 이는 슬프지만 써 놓은 이는 알지 못할 일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글을 닮고 싶다. 같잖은 허상으로 부려놓은 글을 쓰기보다 주어와 동사로만 말을 하는 그 경쾌하고 단박한 한 문장을 닮고 싶다. 연필로 꾹꾹 눌러 담은 그의 글 말이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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