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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Mar 02. 2021

제2화.직장, 지옥이 되다.

침묵 : 직장내 성희롱

은서는 매일 아침, 소돔과 고모라 같은 지옥으로 출근했다.

친구들은 까짓것 때려치워, 라고 말했지만 삶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파트 월세도 내고, 관리비도 내고 저녁 반찬거리도 사고, 가끔씩 영화도 보고, 1년에 한 번 정도 여행이라도 다니려면  천국과 지옥 같은 거 따질 겨를이 없었다. 최 팀장이 악마라도, 그리고 그가 존재하는 그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지옥일지라도, 살아야 했다.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침묵의 새벽이 마치 타임루프에 걸린 것처럼 이어졌다.  

전동차는 덜커덕거리는 소리로 그 침묵을 깨뜨려 보려 했지만, 은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그저 창 밖에 가득 차 있는, 블랙홀 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은서의 머릿 속에는 수치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주위를 둘러볼 잠깐의 여유조차 은서에겐 사치같이 느껴졌다. 은서는 그저 고개를 떨군 채로 미동도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회사가 지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벽이 떠나고 지옥과도 같은 아침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다"      




"어, 이대리, 왔어? 오늘 교육, 있는 날인가?"

"네. CS교육이요. 10시부터 한 시간 교육이 잡혀 있습니다."

"오케이. 수고하고."

"네."

"아, 잠깐... 이대리. 그런데 말이야. 교육하는 복장치고는 너무 야한 것, 아냐? 너무 타이트한 거, 아니냐고? 너무 라인이 드러나잖아. 남자 교육생들 집중을 시키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우린 프로잖아. 몸매가 아니라 실력으로 말해야지. 안 그래?"     


은서는 네, 짧게 말했다. 말하는 것조차 지겨웠다.

세상은 변했다는데 은서를 둘러싼 세상은 달라진게 없었다.      

가해자의 세상은 피해자의 세상에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지저분한 세상이 된 것이 아닐까, 은서는 생각했다.      

입사할 때부터 지금까지 최팀장은 교묘하게 은서를 괴롭혔다.

최팀장의 껍데기를 정확하게 발견한 것은 1년 전이었다. 1년 전. 사내 강사 대회에서 은서는 우수상을 받았고 최 팀장은 장려상을 받았다. 문제는 강사 대회 단골 우승자인 최 팀장이 열 살이나 어린 부하 직원을 질투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직장내 성희롱과 직장내 괴롭힘이라는 법률용어가 은서의 생활용어로 은서의 삶 위에 떠올랐다. 팀장은 노련했다. 법학을 전공해서인지 증거를 남기지 않고 괴롭히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누구도 쉽게 알아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은서를 괴롭혔고 둘만 있을 때면 사람의 탈을 쓴 악마처럼 노골적으로 은서를 괴롭혔다. 내 마음속 원 픽으로 정해 놓은 듯 은서만 괴롭혔다.     

처음에는 질투였다.     


은서가 침묵하자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죄악이 되었다.     

최 팀장은 질투와 죄악의 벌레가 되어 은서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은서의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다른 동료들은 외부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 어쩔 수 없이 최 팀장과 둘만 점심식사를 하게 됐다. 식당에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법이 시행된지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네 달라진 직장의 풍경, 김세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최 팀장이 혼잣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듯한 작은 소리로 공기 중에 한마디를 내뱉었다.     


"바보 같은 놈들!"

"네?"

"아, 이대리. 미안. 그냥 웃겨서."

"..."

"생각을 좀 해 봐. 괴롭힘이란 게 되게 판단하기 어려운 용어야. 요즘 대놓고 괴롭히는 바보 같은 인간들이 어딨어? 괴롭힘인 듯 괴롭힘 아닌 괴롭힘 같은 괴롭힘인 거지. 그거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해 봐. 그거 개인의 감정 문제, 아닌가? 개인이 상처 받았다는 걸 가지고 징계를 해? 참 나이브한 생각이야. 안 그래? 이대리?"     


그깟 법 만들어져 보았댔자, 난 너를 괴롭힐 101가지 방법이 있다, 는 말처럼 들렸다. 기대는 접어두라는 말, 같았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팀장의 괴롭힘은 교묘했다. 최 팀장은 자칭 고도의 법적 지식까지 보유하고 있는 지능형 범죄자였다.  

법은 최 팀장에겐 자기 콧구멍 속의 코딱지보다 못한 존재였다. 법이 과연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은서는 생각했다.      


“이대리는 어떤 스타일 좋아해? 나는 어때?”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퇴근하고 나서도 별로 일정도 없는 것 같고 해서, 남자친구는 있는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혹시 알아? 내가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줄 수 있을지? 나같은 스타일도 괜찮으면 내가 소개해 줄 수 있어. 정 없으면 내가 할 수도 있고. 하하하.”

“...”     


드라마 속 장면을 막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실제 드라마처럼, 옆에 있는 냉수를 그 면상에 부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권력은, 드라마를 현실로 구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게다. 드라마의 세계는 현실 세계의 리얼한 비참함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현실은 더욱 냉정했고, 현실과 맞서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냥 한 번 슬쩍 팀장을 바라본 후, 조용히 밥을 먹었다.

스마트폰의 녹음기능이 소리도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응? 최 팀장이? 그 사람, 말이 좀 직설적이라서 그렇지, 그렇게 끈적끈적한 사람은 아니잖아. 실력이 좋아서 그런지, 존경하는 직원들도 많아. 롤모델이라고 따르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야."     


인사팀 정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정 대리는 이 대리의 입사동기였다.      


“그렇지. 알아. 그 사람의 이중성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나하고 둘이 있을 때만 그래. 나만 오해받기 십상이지. 일단 둘이 얘기할 때마다 녹취...”

“뭐? 녹취?”

“아니, 뭐. 녹취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고. 나중에 증거라도 남겨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래. 뭐. 그런 거라도 남겨두면 좋긴 하겠지. 어쨌든 최 팀장이 실적이 좋잖아. 그리고 팀원들 평가도 좋은 편이야. 그리고 약간 말이 직설적인거 빼면 젠틀한 편이기도 하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최 팀장의 실력은 좋았다.

팀의 성과는 항상 고점에 머물러 있었고, 개인 성과급도 최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력과 인간성이 항상 같은 선을 그리는 건 아니었다.

은서의 삶에서 최 팀장의 선은 이해하기 힘든 곡선과 직선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서, 최 팀장의 부드러운 곡선은 뾰족한 직선이 되어, 은서를 찔러댔다.

누구도 보지 못하는 투명한 선이었다.

은서의 눈에만 보이는 바늘이었다.      


“어쨌든 함부로 말하지마. 조심해. 재작년에 순옥씨, 기억나?”     



     

순옥.

순수한 동료였다.

누가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위선이라는 단어는 순옥의 삶에서 지워진 단어였다.

너무 순수한 사람이 너무 위선적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순옥은 보여줬다.  

같은 팀의 김승균 팀장은 입과 손이 썩어 있는 사람이었다.

입에서는 여자가 말이야, 남자는 말이야, 이런 구시대적인 발언들이 쉴 새없이 터져 나왔고, 손으로는 자신의 발언을 몸소 실천했다.

순옥은 그 입과 손의 희생양이 되었다.

순옥은 팀장의 입에서 나오는 칼날에 가슴이 찢겼다. 순옥의 양심은 승균의 위선의 채찍에 맞아 너덜너덜해졌다. 순옥은 승균의 입과 손의 희생양이 되었다.

계약을 연장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승균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둘이 같이 밥이나 먹자는 김승균의 요구를 거부한 다음날, 계약해지통보서가 순옥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순옥은 조용히 일어나서 인사팀의 정대리를 찾아갔다.

김승균이 자신을 어떻게 성희롱했는지,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조사는 흐지부지되었다.

위로금을 주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순옥은 직장을 떠났다.

사람들은 무기력을 배웠다.

아무리 말해보았댔자, 의미가 없었다.     

성희롱의 조사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성희롱은, 신고가 접수되면, 조사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조사하는 기간 동안 두 사람을 분리해야 했다.

일하는 장소를 바꾸든지, 휴가명령을 내든지 해서, 조사기간동안 두 사람이 부딪치지 않게 해야했다.

그리고 조사결과 성희롱으로 확인되면, 가해자에 대해서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절차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저 피해자의 침묵만이 요구되었다.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되고 있었다.

여전히 조사기간동안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고,

식사 시간에 순옥은 혼자 밥을 먹었다.

결국 순옥은 회사를 퇴사했다.

실업급여를 받게 해주는 조건으로 권고사직으로 처리해주었다.

국가의 법이 회사의 위선과 뒤섞여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옥의 마음 속 세상에 남긴 상처는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그저 잊고, 침묵할 뿐이었다.

한 가족이라는 회사의 구호는 허울좋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정 대리조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순옥 씨도 문제가 있었어. 치마도 너무 짧고. 김승균 팀장하고 너무 친했잖아. 오해의 빌미를 준 것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해.”

“...”     


그나마 믿었던 정대리의 이런 말에 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

커피 한 잔을 벌컥 마시고는 결심했다는 듯, 은서는 입을 열었다.      


“정공일, 내 치마길이 지금 어때? 우리 이렇게 둘이서만 얘기해도 되나? 내가 지금 정 대리 유혹하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아니, 이대리. 그런 말이 아니잖아. 순옥씨도 조금 조심했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성희롱이란 거, 피해자의 감정에만 치우쳐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 안 그래? 억울한 가해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 안해봤어?”     


뜻밖이었다.

정대리의 생각도 뜻밖이었고, 인사팀에 있다는 사람이 기본적인 판례의 내용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뜻밖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최 팀장이라는 권력 앞에서 하지 못한 분노를 정대리 앞에서 쏟아냈다.      


“야, 정공일. 그럼 내가 최 팀장 말할 때 웃으면 안되는 건가? 넌 어떡할건데? 거기서 이거 성희롱입니다, 소리를 질러? 그게 쉬울 것, 같아. 그 사람, 팀장이야! 나는 부하직원이고. 나에게 교과서에나 등장하는 그런 용기를 강요하지 마. 성희롱교육하는 강사들이 와서 항상 하는 말이 그런 거잖아. 성희롱을 당하면 당당하게 거부하라고 말이야. 맞아, 맞는 말이야. 그런데, 정공일. 그거 생각보다 쉬운 것 아니야. 성희롱은 사실상 권력의 문제야. 왜 그 보수적인 법원조차 최근에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쓰겠어? 계약직 직원이 정규직 팀장의 요구에 ‘NO’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 거야. 남들은 쉽게 한 번 툭 던지는 돌멩이같은 해결방법일지 몰라도, 당사자들은 밑바닥에 고여있는 온갖 감정과 의지까지 끌어모아야 ‘하지 마세요’ 말할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억울한 가해자가 있을 수 있다고? 맞아. 그럴 수도 있어. 그거, 부정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래서, 판례가 얘기하잖아. 단순히 피해자의 감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피해자라면 느꼈을 감정을 고려한다고 말이야. 억울한 가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판례도 노력하고 있잖아. 그게 언제적 판례인데, 김승균 편을 들어? 너, 내 얘기 들으면서도 최팀장 편을 들었겠구나. 내가 문제라는 거냐? 순옥씨가 성희롱을 신고하기까지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그 감정은 생각해 봤니? 인사팀으로 신고서를 들고가는 그 발걸음의 무게가 어떤지는 생각해 봤냐고?”     


믿었던 동료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최팀장과 함께 있을 때, 몰래 대화를 녹음하고 있다는 말은 비밀로 해야 했다.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은서 역시 침묵하고 있었다.

법이 현실과 만나기까지 통과해야 할 관문들이 한가득이었다.      




<'노동법의 여왕'의 노트 : 직장내 성희롱>     


1. 직장 내 성희롱이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환경형 성희롱)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근로조건 및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조건형 성희롱)을 말한다.


2. 직장내 성희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행위자에게 성적 동기가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가 있고, 그로 인하여 행위의 상대방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음이 인정되어야 한다.(합리적인 피해자의 관점)


3. 성희롱이 발생하면 일반적으로 신고-조사-확인-조치 등의 절차가 진행된다. 누구나 성희롱발생사실을 신고할 수 있으며, 신고하는 경우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재량사항이 아니다). 또한 조사기간 동안 피해근로자를 분리시켜야 하며, 조사결과 성희롱 발생사실이 확인된 경우 가해 근로자에게 대하여 징계나 근무장소의 변경 등의 조치를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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