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마음, 남편의 배려.
남편과 내가 아이 문제를 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신혼 초에도 남편에게 종종 물었다. 산책 중에도, 운전 중에도, 가끔은 아무런 날이 아닐 때에도. 오빠, 아이 낳고 싶어? 남편은 그때마다 대충 이런 답을 했다. 너의 의견을 존중할게. 아무래도 영향이 큰 건 너니까. 나는 그의 대답에 나를 향한 배려와 사랑을 느꼈다. 남편은 나의 결정에 부담이 될까 봐, 자신의 의견을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남편의 배려 덕에, 남편에 대한 생각 없이 내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꽤나 많이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세지자, 나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남편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남편의 배려도 견딜 수가 없었다. 상담이 2주쯤 흘렀을 때인가, 나는 결국 남편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오빠, 오빠는 왜 오빠 생각을 얘길 안 해? 오빠는 아이가 갖고 싶은 건지 묻고 있잖아. 왜 자꾸 나한테 결정을 미루는 거야? 남편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낳고 싶은 쪽이야. 나는 남편의 생각을 듣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그리고 다음 상담 시간이 되자마자, 상담 선생님께 토로했다. 선생님, 제가 남편을 코너로 몰았어요. 거의 목을 조르다시피 남편을 채근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아이가 갖고 싶대요. 이제 어떻게 하죠?
남편은 물건이 눈앞에 나와있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보기 싫은 물건은 종종 옷장 속에 숨기곤 했다. 옷장 정리를 하던 어느 날, 나는 남편이 숨겨놓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부부 사이에도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나는 책을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을 발견한 때는 상담을 받던 때를 한참 지난 시기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이내 덮어버렸다.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지? 아니, 얘기를 했는데 내가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건가? 아니면, 내가 얘기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아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걸까? 내가 나를 신경 쓰느라, 남편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은 건가? 나는 과거의 나를 빠르게 돌려가며 반성했다. 나는 과연 좋은 아내였던 걸까?
나는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책을 꺼내어 남편에게 사실대로 물어보았다. 오빠, 혹시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고민 중이라면 지금 말해줘요. 남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때, 너 상담받던 때 나도 상담받고 있었잖아. 그때, 사내 상담센터에서 줬어. 근데 상담이 별로여서 난 그만뒀어. 책 보면 네가 너무나도 오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안 보여 줬었는데, 이거 봐. 딱 오해하기 좋잖아. 나는 남편의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남편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남편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거의 몰랐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다.
모든 얘기를 다 꺼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고민이 있다면 고민하는 대로, 주장이 있다면 주장하는 대로 터놓는 편이었다. 나는 그 순간순간 드는 찰나의 생각들을 말했다. 나는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일단 하고 보는 사람. 반면, 남편은 세상 제일가는 장난꾸러기임에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과묵한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필요한 얘기는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말하는 사람. 친구들이 ‘도무지 가만히 있어지지가 않지?’라고 놀리면 수긍하면서, 정작 중요한 말은 타이밍을 기다리는 사람. 어떨 땐 기다리다 보면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지는 일도 생겼다. 그럴 때면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말이 적지 않은 편인데도, 그중에 필요한 말을 가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이 문제로 고민하던 당시는 나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남편 또한 힘든 시간이었다.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남편도 어느 순간, 사내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다만, 미주알고주알 상담센터에서 나눈 얘기를 모조리 쏟아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상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상담을 받는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내용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남편의 얘기는 무거웠다. 굳이 따지자면, 낳고 싶은 쪽이라니. 오빠, 우리는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