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 씨. 놀랍게도 그걸 해야만 살아갈 수 있어요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고

by Chaeyooe


[커버 이미지 출처 = 씨네21]


정우 씨에게


정우 씨. 안녕하세요.

먼저 묻고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실례지만 지금 걷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어디 계신가요?


러닝머신 위?
동호·성수·영동·청담 대교 중 하나?
아니면 걷기 천국 하와이?


만약 아니라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집에서 생선에 부침가루나 튀김가루를 묻혀 팬에 굽는 중이신가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신가요?
그것도 아니면 하와이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신가요?


아, 촬영장에서 연기하고 계실 확률이 높겠네요.

정우 씨는 배우니까요.


= 출처 씨네21 <577 프로젝트>


정우 씨. 혹시 오모리 타츠시가 연출한 영화 <일일시호일>(2018)를 보셨나요? 지난 17일에 개봉한 영환데, 쓰신 책을 다 읽고 나서 저는 정우 씨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영화의 홍보사 직원이었다면 큰 맘먹고 정우 씨에게 GV를 제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주인공인 노리코와 정우 씨는 닮았거든요.


바로 루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요. 정우 씨가 일단 무조건 따르고 보는 것이며 고민과 번뇌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전에 묶어두는 동아줄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것 말입니다. 정우 씨에게 걷기가 루틴이라면 노리코에게는 다도가 그것입니다. 노리코는 스무 살에 다도를 시작해 40대가 되어서도 매주 토요일마다 다도를 하러 갑니다.


취직 시험에 떨어지고 결혼 두 달 전에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뒤에도 그녀는 다도를 이어갑니다. 이 정도만 들어도 제가 왜 두 사람이 닮았다고 느꼈는지 아시겠죠.


정우 씨도 그렇잖아요. 힘들수록,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수록 일단 일어나서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잖아요.

내면의 단단함은 정우 씨와 노리코처럼 절망의 순간에도 계속을 선택하는 사람에게서 생기는 것 같아요. 아직 <일일시호일>을 보지 못하셨다면 이참에 한번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걷기 멤버들과 함께 보기에도 좋은 영화랍니다.


출처 = 씨네21 <롤러코스터>


그럼 이쯤에서 저도 살짝 끼어도 될까요. 제게도 ‘종합 운동하기’라는 루틴이 있거든요. (새천년 건강체조 같은 촌스런 이름이란 걸 저도 압니다.) 여기서 종합 운동이란 스트레칭, 요가, 윗몸일으키기, 팔 굽혀 펴기, 제자리 뛰기 등이 잡다하게 섞인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우 씨처럼 저 역시 이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 제 삶에서 닻의 기능을 해요. 정우 씨가 매일 아침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 전원 스위치를 켜고 다리를 움직여보듯 저도 매일 저녁 일단 뉴스를 틀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목을 한 바퀴 돌립니다. 그다음 어깨와 허리를 돌리고 두 팔도 쭉쭉 늘려줍니다. 그러면 이내 좀 더 몸을 움직이고 싶어집니다. 한 세트를 끝내겠다는 의지가 생깁니다.


아직 마무리 못한 일이 남아 있어 초조할 때, 어쩐지 몸이 무거울 때,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이 들 때도 말이죠.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고 하셨죠.
그 말이 진짜라는 걸 저는 압니다.

출처 = 씨네21


책 읽기 또한 제 루틴 중 하나입니다. 참여하고 계신 ‘걷는 자들을 위한 수요 독서클럽’의 북 리스트와 제 리스트는 사뭇 다릅니다. 제가 주로 읽는 건 소설이거든요. 요즘 저는 정세랑 작가가 쓴 「피프티 피플」(2016)를 읽고 있습니다.


(정유미 배우가 이 작가의 또 다른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에 출연한답니다. 연출은 무려 이경미 감독!)


저는 언제나 책을 읽습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동생을 기다릴 때도 병원 대기실에서 제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도요. 정우 씨는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소소한 행위가 자신을 삶의 늪에서 건져내 줄 거라 믿는다고 했죠.


저는 266쪽까지 읽고 나서도 이어 읽을 267쪽이 있다는 이 별 것 아닌 사실이 제가 이 불행한 삶을 계속할 이유가 되어줍니다.


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중혁 작가가 쓴 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2014)을 아시나요? 만약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주인공 탐정 구동치 역할로 정우 씨가 제격이라는 얘기가 이미 오래전부터 독자들 사이에서 회자됐답니다. 물론 내용도 재밌습니다. 영화화하신 「허삼관 매혈기」(2007)만큼이나요.


출처 = 네이버 영화 <허삼관>


계속 딴 책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작가 제임스 설터가 쓴 산문집 「소설을 쓰고 싶다면」(2018)에 보면 또 다른 작가 앤서니 파월이 한 말이 들어있어요.


소설 쓰기는 외교정책을 수행하는 것과도 같아서 몸 상태가 어떻든 매일 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매일 작업해야 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제가 ‘연기하기’를 떠올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언제 감독의 선택을 받을지 또 어떤 삶을 살아온 캐릭터를 맡게 될지 모르니 항시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테니까요. 무명 시절 마냥 기다리지 않고 몇 군데의 헬스장을 다니고 피아노를 배우는 데 시간을 썼던 정우 씨 또한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출처 = 씨네21 <멋진 하루>


정우 씨. 저는 정우 씨가 맡은 캐릭터 중 <멋진 하루>(2008)의 병운을 가장 좋아해요. 비록 이 책에는 병운의 에피소드가 없지만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어디선가 걷고 있는 정우 씨를 떠올리면 머릿속에 듣지도 않는 옛 애인 희수(전도연 씨가 맡으셨죠) 옆에서 쫑알쫑알 거리며 걷는 병운이 나타나요. 책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반바지 차림을 한 정우 씨가 걷기 멤버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가득한 데도요.


정우 씨. 혹시 지금 걷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멋진 하루를 보내고 계신 거겠죠?




[chaeyooe_book]


출처 = 문학동네


걷는 사람, 하정우 / 2018

작가 하정우

출판사 문학동네

단 하나의 문장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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