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권목 Oct 07. 2022

이 세계는 놀이터에요

에세이_단상

설레는 마음으로 찾았다.

‘이 세계는 놀이터에요’,

오랜만에 이름만으로 설레 본다.

사실 이 식당을 알게 된 것은 오래였고

주변에서 일해 왔으나

퇴근길을 거슬러 가야 하는 그곳으로,

발을 내딛는 건 쉽지 않았다.

다음 일정을 기다려야 하는 긴 공백이 찾아와야만

비로소 자유롭게 발을 옮길 수 있는 것이ㄷ다.


해가 쨍쨍한 오후였다.

작은 탐험을 하기 좋은 순간이었다.

놀이터가 있는 아주 작은 골목, 골목까지

햇빛이 쏟아졌다.

눈을 잔뜩 찡그려야 했고

빛이 닿는 피부가 따가웠지만

환한 낮에 인적이 드문 낯선 골목을

기웃거리는 것은 재미있었다.


“이 세계는 놀이터에요!”


밖에서 전화통화를 하던 사장님은

나보고 들어가라고 눈짓을 했다.

2인석 테이블이 4개 있는

조그마한 식당 구석에 가만히 앉았다.

내리쬐는 햇빛을 받을 때는 몰랐는데

출입구의 자주색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다시 가만히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토스터기에 넣은 식빵이 “땡!”하고 구워지고 “딱딱딱” 청사과가 얇게 잘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과 치즈 샌드위치를 음미하였다.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면서도

그날 하루 햇빛을 너무 많이 받았는지 온몸이 노곤해져 엉덩이를 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놀이터에는 나랑 사장님 외

다른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고

빈 놀이터에 혼자 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 다른 놀이터로 향했다.


햇빛이 세서,

다음 놀이터의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시금 어른이 되어 택시를 잡아탔다.

그날 간 6곳의 놀이터 중

5곳에서 혼자였지만 괜찮았다.

어딜 가나 해는 있었고

처음 가 본 놀이터는 모두

또 놀고 싶을 만큼 좋았으니까.

해가 지고 나서는 마침내 아는 친구 1명과

초면인 친구 2명과 함께 재밌게 놀았으니까.   

  

14살이 되기 전까지 매일 놀이터를 찾았다.

한 번 한 놀이가 재미있으면

그것을 잊지 못하고

계속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촌스러운 아이가 나였다.

이후에는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주로 걷고 끊임없이 같은 곳을 뱅뱅 돌다가 경비실과 공원 의자 같은 곳에서

잠시 앉아 쉬었던 것 같다.

청소년 때는 오래오래 앉을 곳이,

시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학교, 친구, 가족, 넌지시 짝사랑.


같은 곳을 10바퀴 넘게 뱅뱅 돌아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놀이는 그렇게 다른 형태로 변해갔다.


집 근처에는 초등학교 놀이터를 포함하여

9곳의 놀이터가 있었다.

유아용 곰돌이 놀이터부터

토끼 놀이터, 나무 놀이터, 뺑뺑이 놀이터, 거미줄 놀이터, 6단지 놀이터, 탈출 놀이터, 큰 놀이터.

우리는 나이에 맞게, 목적에 맞게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뛰고 놀고 다쳤다.

그때는 말이 없어도 재미있었다.

말을 하기보다는 흙을 파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을 굴렀으며,

간혹 누군가를 쫓아 무작정 우르르 뛰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끊기고 갑작스레 누군가의 비밀이 터져 나오는 순간도 있었다.

쌓이고 쌓인 10살 또래의 비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에는 꽤 무거웠다.

그럴 때마다 받은 비밀이 무거워,

받은 만큼 줄 비밀이 없어 끙끙 앓았다.

과연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되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나의 조그만 불행을 큰 불행으로,

친구의 것과 비슷한 불행으로 부풀리고는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층 더 가깝고 두터워졌지만 무거움은 더욱 커졌다.

특별한 순간이었을 뻔한 그 시간은

한 명의 거짓말로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어떠한 공백도 고민도 없이 열심히 놀고

깔깔깔 웃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친구는 내게

불행한 친구, 미안한 친구로 남았다.

누군가에게 나의 약점을,

불행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혹여나 나와 같은 사람을 마주하게 될까,

그런 것일까?

아무도 해하지 않고 매일 같은 놀이를,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 않았던,

그래서 머리 굴려 무언가를 지어낼 필요 없었던 놀이터의 그 순간을

어느 어린이보다 간절히 바라본다.      


요즘 어린이들도 놀이터를 좋아한다.

어린이 몇 명은 1학년 놀이터는 시시하고

2학년 놀이터가 재밌다고,

자신은 더우니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뛰어나와 친구들 주변을,

선생님 주변을 빙빙 돌고는 한다.

선생님들은 정말로 바깥 놀이를 싫어한다.

선생님들은 이상하게도

학교 놀이터에 내리쬐는 햇빛만은 질겁하며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쓰고, 되도록 그늘에서 어린이들을 지켜본다.

어린이들은 그 시절의 나와 같이

이유 없이 우르르 뛰고,

흙을 파 개미 호텔을 만들고,

그네를 탔다 미끄럼틀을 탔다,

친구랑 오해가 생겨 싸우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와 매미 허물을 찾다,

누가 누가 큰 잡초를 뽑았는지

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어린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더워 죽겠다고 연신 옷을 펄럭거리고

손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고 응석을 부리지만

다음 날도 놀이터에 나올 것이다.

누군가에게 꼭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특별한 자랑거리가

친구와 해가 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논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주로 큰 사건이 되어 전해진다.

놀이터 안이 아니라 밖에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나는

이 놀이터가 그리 놀랍거나 재미있지는 않다.

아무래도 어린이들과는

같은 놀이터에서 같은 마음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세계가 놀이터라면,

작은 것에도 ‘와아아-’ 하며

놀이터는 재밌다는 믿음을

다시 가져볼까 한다.

작가의 이전글 손 가는 대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