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 오는 천에 홀로 앉아있는,
혹은 주위와 어우러지지 못한 채 카페 창가에 멍하게 앉아있는 중년의 여성을 볼 때면,
엄마가 아닐까 싶어 물끄러미 보게 됐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까지는 마음이 불안해 요동쳤고
확인한 후에는 이상하게 서늘해지는 마음을 붙잡으려 애쓰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 포함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엄마'였던 글쓰기 모임이 있었다.
그중 영양상담을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마침 전문가가 계셔 모두 이때다 싶었는지,
글쓰기는 제쳐두고 아이, 가족에 대한 영양상담이 주를 이뤘다.
나도 귀를 쫑긋 열고 ‘국가, 기업이 속이는 식품첨가물 주의’, ‘단백질은 햄프시드 밀크’ 같은 것을
열심히 옮겨 적었다.
그러다 또래보다 왜소한 초등학생 아들이
뭐든 엄마가 해주는 끼니는 거르고
과자, 빵만 먹으며 배를 채워 속상하다는 고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상담이 이루어졌다.
단도직입적인 서두였다.
“아이들은 엄마가 애쓰는 걸 싫어해요.”
아이들은 엄마가 애쓰는 걸 싫어해, 고생하는 걸 싫어해,
엄마가 화내는 걸 싫어해, 우는 걸 싫어해, 아니 그건 무서워,
그러니까 날 위해 가족을 위해 엄마가 힘든 게 싫어.
따지고 보면 당연한 말인데 왜 처음 들어보는 말 같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엄마가 '애쓰는 행위'는 '사랑'이니까,
그걸 몰라주는 것은 '배신'이지 사랑이 아니니까,
주는 모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교과서 같은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어도,
한편으로는 그냥 그 모든 것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에
더 잘하려 애쓰다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엇나갔다.
‘아이들은 엄마가 애쓰는 걸 싫어한다.’
되새기며 옮겨 적고 있었는데 어느새 모두 한 마디씩 덧붙였다.
“맞아, 나도 어렸을 때 그랬어. 지금도 엄마가 이것저것 싸주는 거 너무 싫어.”
“그니까 그게 얼마나 고생인 거 아는데, 그런데 꼭 다 먹지도 못할걸.”
“그래도 엄마 돌아가시니까 생각나더라. 진짜 많이 싸우고 울었는데... 지금은 못 먹는 거 왜 그랬을까.”
다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애쓰는 사랑을 받고, 애쓰지 않는 사랑을 주고 싶어 애를 쓴다.
결국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마음이 다르게 전해질 것을 알면서도,
애쓰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엄마는 사랑한다고, 네가 최고라고 다독이며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기보다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봄나물과 쑥국 같은 것을 차려주고는
식구들 먹이느라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아프다는 말을 하며 몹시 지친 모습만 보였다.
그럼 난 고마움보다는 죄책감이 커져 그 나물과 쑥국을 양껏 흡수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늘 엄마가 원하는 만큼 반찬을 다 먹지 못하고
건더기만 겨우 건진 채 보약과 다를 바 없다는 국물은 남긴다.
엄마의 서운함이 더 커진다.
“그래, 어차피 내 말은 안 듣지.”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맞출 수 없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도
한계에 다다른다.
우리는 서로를 상처 준다.
그리고 각각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화를 식히고 울고 저주를 퍼붓는다.
표정이 사라진다.
하지만 나 역시 애쓰는 사랑밖에 모른다.
“아이들은 엄마가 애쓰는 걸 싫어해요!”
그 말에 난 머리가 띵하기 전, 먼저 서운함을 느꼈다.
‘왜 아무도 한 사람의 애씀을 몰라줄까...’
나 역시 엄마 같은 엄마가, 사람이,
애써 힘듦을 감수했으니 사랑을 달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엄마의 마음이 꼭 내 맘 같다.
이미 속으로 엄마 탓을 하도 많이 해서
이것까지는 엄마 탓을 하고 싶지 않은데
이미 엄마 탓을 한 것 같다.
오랜만에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같이 울던 때가 있었다.
전에 친구가 애인 때문에 매일 울어 힘들다는 말을 해서
왜 내 친구가 속상해야 하나 ‘망할 놈’했지만,
'근데 친구는 뭐가 그리 서글퍼서 울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남 일같이 여긴 적이 있었는데,
내 일이 되었다.
당시 내가 정확히 왜 서운하고 눈물이 나는지 도통 납득이 가지 않아
답답하고 설명할 수 없었는데,
애를 쓰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애를 썼는데도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가 움직이지 않아서,
나는 맞추려고 애를 쓰는데 애인은 그렇지 않아서 그랬다.
나의 '10%, 70%'가 떠올랐다.
책 <H 마트에서 울다>의 작가 미셸 자우너의 엄마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너의 '10%'는 남겨두라는 조언을 했고,
SNS 속 한 정신과 의사는 연인에게는 나의 '30%'만 주어야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난 그 말을 듣고는 제일 먼저 서운했다(서운한 게 너무 많아서 문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계를 정하고
100%를 주지 못하는 이 냉혹한 현대사회를 즉각 비난했다.
허나 100%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사실 난 가벼워졌다.
엄마나 나나 꽤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100%를 내어 줄 수 없는데도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애를 써서 힘든 거 아닐까?
친구도 그랬을까?
서로 100%로 불타는 사랑은 운 좋으면 죽기 전에 해보고 바로 죽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면서도
애를 썼지만 '싫다'는 말만 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우선 되새기게 된다.
너무 하잖아. 엄마는 맘껏 힘들어하지도 못하는 사람인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엄마가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싫은 것을 내비치는 게 부담스럽고 싫다는 이유로,
거부해 버리면 그만인가?
이 애쓰는 사랑을 쉽게 놓아버릴 수 없는 사람.
그래,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나와 엄마'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뜻하지 않게 만났던, 표정이 없어 마음을 ‘쿵’ 하게 만들었던 중년의 여성들을 보며
엄마일까, 엄마가 아닐까 조바심을 냈던 것은
자식, 남편, 부모, 친척, 직장, 가사, 말 그대로 온갖 문제에 시달려
봄이 왔지만 꽃이 핀 줄도 모르고
매일 표정 없이 같은 길을 걸어 다녔다던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내가 어릴 적 엄마의 남동생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고
가족 내 많은 책임을 떠맡게 된 엄마가
어느 밤 세탁실 앞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다 나를 마주쳤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엄마 친구가 이렇게 하면 속이 좀 풀린다고 해서,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라고 했다.
어린 나는 담배와 거짓말,
그리고 엄마의 낯설고도 공허한 표정이 무섭기만 했다.
이후에도 엄마는 계속 애를 써야 했다.
그런 엄마가, 엄마를 많이 닮은 내가, 우리가,
한없이 가볍고 다정한고 무리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나 먼저 가볍게 엄마를, 다른 것들을 사랑해 보기로 한다.
그럼 엄마도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럼 주저하지 않고 각자 가벼워진 70%만으로 다른 세계를 둥둥 떠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우린 서로를 좀 놓아도 서운하지 않겠지?
그렇게 가벼운 결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