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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니 Jan 31. 2022

세렌디피티 커피의 맛

고려대 정문 앞, 사라진 카페에 관하여

 세렌디피티 커피의  

​​​​


정문을 우뚝 서서 지키고 있던, 커다랗지만 조금 낡아 보이는 카페가 있었다. 그곳은 3층 자리 건물이었고 사람들은 짧은 시간담소를 위해서는 1층에 머물렀으며, 늦은 시간까지 과제를 끝내야 하는 경우에는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스타벅스가 아닌  3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이 힘든지 바글바글한 2층과는 달리 3층은 고즈넉한 곳이었다.

​​


나는 기숙사에 잠깐 살다가 홀로 사는 삶에 로망을 품고 고대 정문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거기서  5년을 살았다. 정문에서 교육관까지 가는 데에는 백기 , 엘포관과 현차관을 지나는 오르막길이 있었으며 자본 냄새가 나는 현차관 옆에는 낡고 볼품없는 사대 신관과 운초우선 교육관이 있었다. 처음으로 높은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스무 살의 어느 , 나는 높은 굽을 신고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높은 굽을 신는 것이 익숙지 않아 자꾸만 걸음이 빨라져  다리는 의지를 거슬러 뛰어가고 중력인지 뭔지 때문인지 걸음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나서야 분홍신이 춤추기를 멈추었다. 이제는  구두를 신고 내리막길도 척척 내려간다.​


등 떠밀려 성인이 된 키 작은 아이는 정문에서 술 취한 할아버지의 횡패를 받아낸 적도 있었고 일명 “도를 아십니까”를 하루에 두 번이나 당한 적이 있다. 신천지 신도가 내게 다가와 심리테스트를 해주겠다고 한 적도 있다. 이상하게 늦은 밤, 공부를 끝내고 집에 가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자신이 신을 만났다고 증언하는 여성 분이 오랜 친구 같다고 느꼈던 적도 있다. 결국 그분은 내 집 앞까지 쫓아오셨고 나는 그분의 말씀을 끝까지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집으로 들어갔었다. 아, 누군가가 세렌디피티 앞 나무에 올라가 소방차와 경찰차가 구하러 온 것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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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고대 앞 정문은 우당탕탕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세렌디피티가 사라졌을 때에는 마치 친하진 않지만 일면식은 있는 지인이 임대료를 못내 방을 뺀 것만 같았다. 허전함에 먹먹함을 느끼다가도, 곧 다음에는 어떤 가게가 들어올지 기대가 되었고 그 건물의 기둥이 새빨간 페인트로 칠해질 때에는, 드디어 정문에도 할리스 커피가 들어오는구나 싶어 할리스에서 24시간 공부를 할 계획을 세웠다가, 그 건물이 결국 3층짜리 훠궈 식당임을 알게 되었을 땐 좌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세피’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


- 언니, 정문에 세피 사라진 거 알아? 

- 잉?

- 근데 거기에 훠궈 식당 3층짜리로 들어옴

- ;;정문 거의 차이나타운

​​


 친구들은 졸업과 동시에 본가에서 공부를 시작하거나 취업을 했기에 나는 정문에 남아있는 얼마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특종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을  없었다. 여기저기 내가 속해있는 단톡방에 3층짜리 훠궈 식당 사진을 찍어 올렸고 친구들은 사라진 세렌디피티에 애도를 표했다. 커피는 맛없지만 상징성은 있는. 정문에서 만나자고 하면  정문 앞이 아니라 세피 앞에 나와있는 사람이 있더라는, 그런 추억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과연 세렌디피티를 추억하고 싶어  3층짜리 빨간 건물을 싫어하게  것일까. 그곳에서 나는 친구들과 과제를 했고, 중학교  담임 선생님과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으며 중지에서 공부하는  따분할  즈음 가방을 챙겨 나와 세피 3층에서 학교의 야경을 바라보며 공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곳이 할리스커피로 바뀐다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훠궈를 싫어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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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H 세렌디피티에 자주 갔다. 우리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과제도 같이 하고 공강을 같이 보내던 사이였는데 어느샌가 연락이 끊기고  친구의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 있었다.  친구의 바뀐 번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는 소문만 있을 뿐이었다. 그저 나는 내가  친구의 마음을 더 들여다보았어야 했다고 후회할 뿐이다.


세렌디피티가 사라진 것이 꽤 슬프다면, 그 이유는 훠궈 식당이 들어섰기 때문이기보다는, H를 비롯해 다 함께 미래에 대한 아무 걱정 없이 놀기만 하던 추억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이 서럽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세피 커피는 아무 맛도 안나는 맹물이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마신 커피는 이상하게도 짠맛도 나면서 맵기도 했다. 대개는 달콤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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