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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비 Oct 09. 2024

생존 맛집

엄마밥은 살 안쪄

    24년 8월 23일, 그러니까 정말 최근의 일, 겨우 보름 전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전 아빠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침대 위 하얀 시트가 선홍색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시키던 어금니가 크게 흔들렸고, 부모님은 재빨리 치과로 향했다. 이미 십 수년 동안 괴롭혀온 어금니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한다는 대학병원을 여러군데 돌아도 하나같이 어려운 수술이라고만 하고 조금 더 참아보라고 해서 참은 것이 벌써 십년이 넘었다. 결국 탈이 난 어금니는 제 스스로 아빠의 치열에서 이탈하고자 했고, 아빠는 갑자기 잇몸 속에 있는 신경과 뼈까지 치료를 해야했다. 나름 대수술을 받고 온 아빠는 씩씩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많은 수술을 받아봤다는 전력 때문인지,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걱정을 시키지 않겠다는 의도였는지, 앓던 이가 빠졌다며 우린 수술 성공에 기뻐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치과 치료를 시작한 날부터 아빠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통증이 문제인지, 염증 때문인지 서서히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거동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결국 금요일 아침, 아빠는 응급실로 향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의료 파업 때문인지 지척에 있는 모 대학병원으로 가던 구급차는 가던 길에 거절을 당해 다른 2차 병원으로 핸들을 돌렸다. 겨우 수속을 밟은 병원에서는 음압실과 CT실을 오갔고, 이쪽 팔에서 피를 뽑고 저쪽 팔에는 링거를 꽂았다. 폐결핵과 폐렴, 알 수 없는 병일 수도 있다며 미뤄지는 진단에 온 가족의 피가 말랐다. 2024년도에 폐결핵이라니, 폐결핵에 걸리면 최소 6~9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고 전염성이 있는 동안은 가족도 볼 수 없다고 하니 제발 폐결핵이 아니길 바랐다. 그렇다고 폐렴이길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뭐가 더 나은 병인지 저울질을 하다 그만두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아빠와 통화가 되었다. 아빠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날카로웠다. 별일 아니고, 입원에서 좀 쉬면 낫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그로부터 삼일 동안 아빠가 곡기를 끊었다는 소식만 전해들었다. 코로나 시절처럼 격리병동에 입원한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건 보호자인 엄마 뿐이었다. 그마저도 우주복 같은 위생복을 입고 들어가야 볼 수 있었는데, 아빠는 그 사이 힘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에서 낙상하여 눈 주변이 푸바오처럼 거무스름하게 큰 멍이 들었다. 간혹 가족이나 지인의 병문안을 갔을 때, 온통 ‘낙상주의’라는 팻말이 붙어있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환자가 힘이 없으면 고꾸라지게 마련이고, 제일 무거운 머리부터 떨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에서 엄마의 전화로만 들려온 아빠의 상태는 마치 자꾸 돌아오지 않을 사람 같았다. 곡기를 끊었고, 말을 할 수 없다 하니 의식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불안했다. 그동안 발길을 끊었던 성당에 나가 끝없이 기도했다. 밤에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깨서 기도하기를 반복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우주이고, 모두 이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럼 내 에너지가 아빠에게 가 닿기를, 생명력을 나누어 달라고 기도했다. 회사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친구가 서운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족만 건강하다면 세상에 문제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입원한지 5일만에 드디어 아빠가 말을 하기 시작했고, 마침 폐결핵도 아닌 것으로 진단이 나왔으며, 폐렴으로 보이는 염증 증상도 잡혀간다고 했다. 아빠는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병원밥은 입에 맞지 않는다며 엄마에게 사식을 요청했다. 엄마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사식을 해다 바쳤다. 부드러운 미음에 참기름과 간장을 섞은 양념을 필두로, 몰랑몰랑하고 부드럽게 구운 계란 프라이, 소화가 잘 되게 심지를 다 다듬은 우거지로 끓인 된장국, 위를 보호해주는 양배추찜과 시골 된장과 두부를 으깨 만든 쌈장, 역시나 소화에 도움이 되는 달큰한 무화과 등등등. 아직은 소식을 할 수밖에 없지만 아빠가 요청하는 메뉴도 늘어났고, 간을 보는 입맛도 살아나 까다로움은 배가 되었다. 아픈 사람의 까다로움과 신경질은 함께 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길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그 날카로움마저 생명력으로 느껴진다. 이제서야 아빠가 살았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 아빠가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크게 아팠던 건 이번이 두 번 째였다. 처음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어느 날 건강검진을 받고 온 아빠는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치료를 위해 위 절제술을 받았다. 지금은 의학도 많이 발달하였고 무조건 째고 가르는 수술은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암세포가 발견되기만 하면 그 주변을 모조리 도려내곤 했다. 위스키 한 병을 마셔도 끄떡없고, 매일 담배를 달고 살던 아빠는 하루 아침에 즐기던 것들을 도려낸 위와 함께 모두 끊어냈다. 우리집의 식탁 위 풍경도 이때부터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 요리 선생님이라는 엄마의 커리어 때문에 제철 요리와 화려한 음식을 고루 먹고 살았지만, 건강식이나 암 환자 식단이라는 개념은 생소했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암 환자, 특히 위암 환자에게 좋다는 식재료를 가지고 우리집 식탁을 바꾸기 시작했다. 

    윤기가 흐르는 백옥 같던 쌀밥이 잡곡밥으로 바뀌었고, 위에 좋다는 양배추찜, 데친 브로콜리, 마늘구이는 기본찬이 되었다. 원래도 짜고 단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지만, ‘간’이라는 것이 사라졌나 싶을 정도로 국과 반찬들의 간이 밍밍하게 바뀌었고, 재료를 고르는 눈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가끔 먹던 햄이나 인스턴트 반찬, 엄마가 없을 때를 대비해 사다 놓은 레토르트 식품은 자취를 감췄다. 물도 온갖 좋은 물을 이 산 저 산에서 퍼다 마시고, 백화점이나 수입 상가에 가서 사다 마셨으며, 암 세포를 죽인다는 상황버섯 같은 걸 사다가 끓여먹게 되었다. 온가족이 하드코어 유기농 유저가 되었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갈비집을 다니던 외식 패턴도 한정식이나 발효음식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이런 대폭적인 변화와 노력 때문이었는지, 아빠는 이후 5년, 10년의 추적 검사 후에 ‘완치’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우리 가족 그 누구도 어떤 질병에도 시달리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 우리도 분명 아빠의 수술 이후, 길어야 100일 정도 노력하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맛있는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가족이니 이젠 다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전의 습성으로 돌아가 건강하지 않은 음식도 맛만 있다면 신나게 먹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인지하고 다짐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아빠의 실행력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커리어로 쌓아 올린 경력도 다 내려놓고 촌스럽고 수수한 음식이야 얼마든지 만들겠다는 엄마의 희생과 노력이 새로운 삶의 패턴을 만들어냈다. 아빠도 20여년 전 아빠를 살렸던 것이 아내의 밥이라는 걸 몸이 기억했던 것일까, 이번에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사식을 넣어달라는 것이 첫 마디였으니 우리는 모두 다 엄마밥이 살려낸 사람들이다. 엄마의 음식은 사람을 살려왔다. 엄마는 생존 맛집이다. 

    하지만, 정작 엄마가 아플 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엄마는 온 가족 중에 가장 튼튼했고,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거나 쓰러진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다. 엄마는 본인이 먹고 싶은 것보다 가족이 원하는 음식을 해주다보니 어느 날에는 엄마가 정말로 생선 대가리만 좋아한 것인지, 라면에 계란을 푸는 걸 좋아하는지 수란으로 먹는 걸 좋아하는지, 샐러드에 참깨 소스를 좋아했는지 싫어했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우리의 입맛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엄마의 진짜 입맛은 잘 모르는구나. 엄마가 두통이 있을 때, 치통이 있을 때, 혹은 위장이 아플 때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일까. 더 늦기 전에 알아둬야 할 메뉴들을 떠올려본다. 다가올 엄마의 백세시대와 건강을 염원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엄마만을 위한 기도인지, 나를 위한 기도인지 의심스러워지는 밤이다. 사는 동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겠지만, 그럼에도 위태로운 순간에 나 역시 엄마를 살릴 수 있는 요리를 해낼 수 있기를, 기도에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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