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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기덕희덕 Sep 02. 2022

본바탕대로

바탕재료 종이이야기 

대형화방에 가면 다양한 재료들이 종류별로 나뉘어져 진열대 가득이 놓여있다. 드로잉 코너엔 연필, 콩테, 목탄, 파스텔, 오일파스텔 등이 진열되어 있고, 채색 코너엔 수채, 아크릴, 유화, 과슈 등의 색색깔의 재료들이 찾기 쉽게 나뉘어져 있다. 그 옆에는 채색재료의 도우미 역할을 하는 다양한 보조제가 사용설명과 함께 진열되어 있다. 붓, 조각칼, 파레트, 소분통과 같은 도구도 그 용도를 알아보기 쉽게 분류해 놓아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근데 설명을 읽어보아도 샘플을 만져보아도 이게 이거 같고, 저게 저거 같아서 각 차이를 느끼기 어려운 재료가 있다. 바로 종이다.


구매를 돕는 샘플지가 있어도 종이의 무게, 사용용도가 안내되어 있어도 써보지 않고는 알 수 없어서 일단 사서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종이 하나를  놓고 연필, 목탄, 오일파스텔로 드로잉 해보며 건조한 재료가 가진 단단함과 무름의 강도를 얼마나 잘 견디는지 살펴본다. 또는 물감과 같은 습한 재료에 종이가 울거나 보풀이 생기는지 물에게 반응하는 속도와 번짐현상을 살펴보고 ‘아 이건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하고 감을 잡는다.


종이는 회화의 지지체 중의 하나이다. 드로잉, 채색재료만 갖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허공에 대고 '모나리자'를 그렸다면 당시 유명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석고로 밑칠한 목판이 없었다면 '모나리자'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많은 관객들을 모으는 루브르 박물관의 아이콘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지체라는 단어대신 바탕재료라고 설명한다. 채색재료들을 안전하게 받쳐주고, 담아내어 자유롭게 표현하고 오랜시간이 흘러도 변질 되지 않도록 돕는 ‘바탕’이 되는 재료로서 말이다. 


회화재료 중 다루기 쉽지 않는 채색재료로 수채물감을 꼽는다. 대표적인 습식재료로 물을 잘 다루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바탕재료인 종이가 물에 잘 견디고, 다양한 표현기법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수채화용지로 와트만 지를 사용한다. 마(麻)나 면(綿)의 파쇄물을 원료로 하는데 고열로 압축하여 사용한다. 압축 정도에 따라 세목, 중목, 황목으로 나뉜다. 가장 압축률이 높은 세목은 표면이 매끄럽고 단단하여 물이 종이에 흡수되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황목은 거칠한 표면에 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른 대신 종이 안에서 색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혼합되어 자연스러운 색감을 표현할 수 있다. 물에 취약한 성질로 인한 혼란스러움이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동양에서는 채색화를 위해 장지를 사용하는데 3장 겹친 합지를 주로 사용한다. 장지는 황목처럼 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고, 번짐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아교액을 발라 종이의 내구성을 높힌다. 동서양 모두 물을 잘 다루고, 심미적인 효과, 안전한 보관을 위해 바탕재료에 별도의 가공처리를 한 것이다.


그만큼 종이는 그 성질이 다양하고 매우 예민하다. 그러나 겉으로 얼핏보면 그냥 다같은 흰색의 무지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모습처럼 말이다. 우린 겉모습을 관찰하고, 그 사람의 역사를 살펴보고, 대화를 나누며 그가 가진 근본이 되는 본디의 바탕인 ‘본바탕’을 탐색한다. 이 사람의 근본은 가정환경, 배움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해나가며 사회 속의 자아로 형성된다. 종이처럼 환경적 요인, 자극요인, 관계 속에서 잘 어우러저 살아나가기 위해 가공처리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펼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주변사람들과 원할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본바탕과 바탕은 타인의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선입견을 갖게 한다. 가정환경이 취약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두고 본바탕이 좋지않다고 혀를 끌끌 차던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본바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약하게 작용해 선입견을 낳고, 금수저/은수저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각자 자기가 갖고 있는 ‘본바탕’을 가공하기 위해 학력을 쌓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그에 걸맞거나 위장하기 위한 의식주를 소비하고, 전시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자칫 잘못해 철저히 가공해온 '바탕'에 흠이 가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역시 본바탕이 잘나야..’ 


참으로 속상하게 하는 말이다. 원래 나고 자란대로 생긴대로 수용하며 살아가야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본바탕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치열하게 하며 살아간다. 잘 생각해보면 본바탕을 가공하는 이유는 더 잘 나아보이고, 높은 성과를 얻고,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본바탕이 주변의 환경, 대인관계,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잘 반응하고 상호관계를 잘 맺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저 이 세상에 적절히 반응하며 부딪혀서 아파보기도 하고, 실수를 실패로 여기지 않고 유연한 태도로 다시 일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공처리는 세상에 대한 적응력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원래 갖고 있는 성질을 어떻게 가공처리를 하고, 무엇과 반응하여 함께 어우러지도록 자극하여 원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는 황목에 가까운 사람이다. 주변영향을 잘 받아 내 본성이 잘 흔들리고, 작은 일도 오래 내 안에 남는다. 한번 그어지면 이미 흡수되어버려 지우기가 힘들다. 이 흡수력은 장점이 되곤 한다. 내향적인 사람임에도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을 열고 잘 받아들여 친화력을 발휘하곤 한다. 중년이 된 지금, 황목인 내가 마음에 든다. 꼬장꼬장한 꼰대보다 허술한 수졸(守拙)이 되어 설렁설렁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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