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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율밤 Dec 21. 2022

혼자의 시간이 길기만 한 당신에게 소소한 추천(2)

필사 편

혼자 살고 나이가 들어가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결혼한 친구들은 가정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니 자주 못 만나고, 결혼을 안 한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니까 만나러 가는 것만 해도 시간과 에너지가 적잖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가 든 만큼 자연스럽게, 또 가족이 함께 살 때보다 한 사람 몫의 살림만 금방 정리하면 되니까 그만큼 여유로운 시간이 넉넉히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여유로운 시간의 여백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 고민 중이라면 필사를 권해보고 싶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외부 활동을 하는 것에 조금 지쳤다면 혼자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남들이 하는 것 중에 되게 좋아 보이면서 손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있으면 냉큼 따라 해 보는 습성이 있다. 필사도 필요성을 느껴서라기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필사를 하면 문장력이 좋아진다더라’ 하는 글을 보고 어려워 보이지 않아서 금세 따라 해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필사란 글을 베껴 쓰는 것뿐이어서 하려는데 준비할 것이 많이 없다.

준비물 : 필기구, 종이, 베껴 쓰고 싶은 글. 끝.

‘모든 취미는 장비 빨’이라는 말도 있지만 필사는 장비를 갖출 필요가 없다.      


첫 필사는 일본 소설가 츠지 히토나리의『냉정과 열정사이 blu』였다. 그 소설은 펼쳤을 때마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자주 읽었던 책이었다. 그래서.. ‘몇 개월 만에 1권을 필사할 수 있었다,’고 적을 수 있었다면 참 멋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는 못했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했지만 필사 공책 몇 페이지 정도를 겨우 넘기자마자 팔목이 심하게 아파왔기 때문이기도 하고(준비물에 튼튼한 팔목을 덧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눈으로 텍스트를 쫓아가는 것에 비하면 꼼꼼히 읽어가며 틀리지 않게 한 글자씩 적는 것은 매우 더뎌서 집중력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필사라는 것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눈과 손, 사용하는 도구가 다른 방법으로 텍스트를 경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눈으로 읽을 때 소설가 츠지 히토나리는 가벼운 터치감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손으로 적으며 따라 해 보는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냉정과 열정 사이의 필사는 한 권을 다 베끼지 못한 채 중단된 상태다.      


첫 번째 시도는 1페이지부터 끝까지 도전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으로 인하여 실패했다고 생각하기에 요새는 내 머릿속에 새겨 넣고 싶은 부분들만 골라서 필사를 하고 있다.


내 안의 어딘가에 새기고 싶은 글들은 소설일 때도 있었지만 소설의 서문일 때도 있고 심리학 서적, 시, 잡지의 한 줄 일 때도, 기억에 남는 노래 가사일 때도 있다. 어떤 글이건 내 맘에 투명한 파장을 일으키는 문장과 글이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필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사 공책의 한 페이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이렇게 대단치 않은 작업이지만 취미로서 추천을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준비물이랄 것이 없어

시작이 용이하고, 혼자 할수록 더욱 몰입할 수 있어서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데 안성맞춤이라는 점이 그렇고,

내가 필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처럼 문장력도 나아진다고 믿고 있어서다.

    

(예를 들어 영어회화를 공부하는 상황에서 어떤 문장을 한 번이라도 소리 내서 읽어보거나 입 밖으로 꺼내봤어야 필요한 순간에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필사했던 문장들도 내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긴요한 상황에 좋은 문장으로 출력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필사를 꾸준히 하는 이유는 손으로 직접 남겨놨던 글 조각들이 오래 지나지 않아 버팀목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아무런 흥미도 생기지 않고 나를 감화시키지 않는 구절을 필사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이거 진짜 좋다면서 양자학 교과서를 필사하라고 준다면,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학문임은 알겠으나) 내게는 그저 학교 다닐 때 반성문으로 쓰는 깜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츠지 히토나리, 냉정과 열정 사이 blu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서문
최은영, 쇼코의 미소 중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내일은 오니까‘ 라는 제목의 만화 원피스 ost를 불렀다. 일본어지만 가사가 참 예뻐서 이것도 적어봄
정혜윤, 아무튼 메모

좋아해서 필사로 남기는 글은 종이에 적음과 동시에 마음과 머릿속에도 사각사각 적히는 기분이다. 그렇게 마음과 머릿속에 적고도 금방 잊지만 나중에 공책이나 일기를 펼쳐 그 문장을 재회하면, 처음 읽고 느꼈던 설렘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런 순환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 있는 글을 체감하는 것이다.    

 

어제 일기에 짧게 필사한 글은 이것이었다.    

 

당신을 위로하려는 사람이, 당신에게 이따금 힘이 되는 그런 단순하고 소박한 말들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으리라 여기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삶은 분명 당신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난과 슬픔 속에 자리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당신에게 그와 같은 말들을 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글을 읽고 일기에 베껴 적으며 나를 위로해준 이들은 얼마나 고단한 시간들을 통과해왔을까 싶어 애처롭기도, 그 시간을 감내한 그들이 전해준 위로가 참 따뜻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부디 혼자만의 시간이 길기만 하여 슬픈 사람들에게 한 번이라도 가볍게 시도해볼 만한 것이길, 내용은 소소하지만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곡한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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