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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환 Oct 31. 2021

[음악과 추억하는 법] 6. 기보(記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 파스칼 키냐르 희곡



작가 | 파스칼 키냐르

출간연도 | 2018 년


Even inanimate things have their music. Listen to the water dropping from a faucet into a bucket partially filled.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도 나름의 음악이 있다. 수도꼭지에서 반쯤 찬 양동이 속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라.
- 시미언 피즈 체니의 기보집(記譜集) <야생 숲의 노트 Wood Notes Wild> 중에서


시미언 피즈 체니(Simeon Pease Cheney, 1818~1890)는 19세기의 기독교 사제이자 음악학자다. 처음으로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악보로 옮겼으며 무생물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몸소 연구했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음악 위의 음악’을 뜻했다. 모든 움직임과 시야에서 음악적인 흐름이 담겨있음을 직접 믿었고 음악적인 귀감으로서도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았다. 자연의 소리를 기보하려 했던 체니 신부는 실존 인물이지만, 파스칼 키냐르 작가의 2018년 희곡작품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에서 아내를 잃고 정원을 가꾸는 허구적 인물로 각색된다. 실존 인물에 상상의 이야기를 입힌 이러한 흥미로운 설정은 음악과 생래적 그리움의 조화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영롱한 의도 덕분이다. ‘기보’라는 모티브는 작중 인물이 아내가 떠나면서 남겨 놓고 간 고통과 그리움을 보다 시청각적인 요소로 승화시킨다. 정원의 모습과 그곳에서 기보된 소리에서는, 독자들 저마다 언젠가 경험해 본 슬픔이 효과적으로 묻어나게 되는 것이다.




음악 소리를 악보로 재생한다는 의미의 ‘기보’.

체니 신부에게는 음악의 경중함이 사뭇 다르다. 악기와 인간 사이의 마찰로 발생하는 파동의 리듬뿐만 아니라, 태초의 것, 즉 자연 그대로의 소리까지 음악으로 수용한다. 앞서 언급했듯,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양동이에 부딪히는 주기와 리듬이 음악 그 자체임을 말이다. 옷걸이에 걸린 케이프들과 모자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기웃거리는 사뿐함마저 그에게는 훌륭한 기보의 대상이다.


<마태복음> 제13장 9절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오직 노래하는 새들이 있을 뿐입니다.
주방의 돌계단 옆에서, 함석 홈통 아래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양동이는 하나의 시편입니다!
겨울에, 사제관 복도로 난 현관문을 잠시 열면, 옷걸이에 걸린 케이프들과 모자들이 소용돌이치며 넘실거리는 아르페지오,
그것 역시 찬미가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시편’이라고까지 미음 하나하나 되새기는 남다른 음악 철학은 그가 자연의 소리를 기보한 책 <야생 숲의 노트 Wood Notes Wild>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제관 정원을 거닐며 마주하는 파랑새, 울새, 멧종다리 등의 40가지가 넘는 새소리들을 직접 기보한 책이다. 기보된 음표들을 실제 연주에 옮겨 놓으면, 일정한 박자와 호흡이 있는 흔한 멜로디와는 사뭇 다른 완연함이 돋보인다. 인위적으로 닿지 못하는 자연물의 조잘댐이 꾸밈없이 표현되는데, 주로 가볍게 톡톡 튀는 8분음표와 16분음표의 곡조로 이 같은 새소리들을 세심하게 다룬다. 자연과 음악을 향한 온유돈후한 관심은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만의 생생한 초록의 질감과 분위기를 형성한다.


희곡 속 상상의 인물인 체니 신부에게 있어서는 기보란 죽은 아내를 직접 보듬어 줄 명백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 에바 로잘바 밴스 체니는 27년 전 딸 로즈먼드 에바 체니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다. (실제 시미언 피즈 체니 신부에게는 딸이 아닌 아들이 있었고,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의 체니 신부 이야기는 상당 부분 각색되었다.) 아내 에바 체니는 죽기 전, 사제관의 정원을 거닐고 가꾸기를 몹시 좋아했다. 정원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체니 신부가 직접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까지 아내에게 사랑을 보였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만큼 체니 신부는 아내를 사랑했고, 여전히 그녀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다짐한다. 그런 점에서, 정원은 체니 신부에게 단순한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정원은 평범한 공간성이 아닌 아내 자체가 깃든 영혼성의 것이 되고, 정원의 새소리를 기보하는 행위는 아내와 맞닿아 다시 사랑을 나눈다는 상징적 의미를 체니 신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원은, 그녀가 수태했던 거니까 그녀의 얼굴인 셈이지.
왜냐하면 정원이란 얼굴이거든!

정원은 늙지 않는 신비로운 얼굴이란다.

이곳의 색깔들은 다채롭게 늘리고, 이곳의 모든 씨앗을 한 알씩 봉투에 넣어 학명을 기입하고, 이곳의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며 살아가는 온갖 새의 노랫소리를 기보하기 시작했단다.




그러나, 그의 딸 로즈먼드는 망아가 된 아버지로부터 존재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체니 신부가 정원과 기보에 더욱 집착할수록 로즈먼드는 아버지에게 슬픔의 원인으로서 더욱 각인이 된다. 그에게 딸은 그저 아내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결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급기야 딸이 집에서 쫓겨나면서 체니 신부가 빠진 절망과 그리움의 깊이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희곡은 아버지의 상실감으로 인해 또 다른 부재를 낳는 갈등을 엮으면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절대적인 거니까. 사랑에 유통 기한 따위는 없어. 사랑하는 그녀와 비교할 만한 여자는 절대로 없단다.

바로 네가 원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엄마는 살았을 텐데.



딸에겐 무척이나 버겁도록 직설적이다. 아버지는 딸이 옆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딸은 아버지를 홀아비로 남겨 둘 준비를 한다. 로즈먼드는 아버지 곁을 떠나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도록, 그렇게 내버려 두기로 한다.


체니 신부는 기보집 <야생 숲의 노트>의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보내지만, 매번 출간 거절을 당하는 게 일수다. 사제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한다는 둥, 음악의 규칙을 뭉그러뜨렸다는 둥 세간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그는 우미한 자연음악의 당위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거절은 그의 알찬 일상에 흠을 내고, 상실을 받아들이는 그에게 맹목적인 위로조차 가식적이다. 반면, 오랜 세월 동안 로즈먼드는 피아노를 가르치지만 어느 순간 피아노의 선율은 더 이상 그녀의 귀 안에서 맴돌지 못한다. 많은 소리를 주워 담을 순 있어도, 단 피아노 소리만이 그녀를 허락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기보 작업만큼 딸의 정당성을 얻지 못한 데로부터 오는 심리적 불안감이 오래된 탓이었으리라. 교습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처지에서 로즈먼드는 아버지 사제관으로 다시 돌아가길 스스로 재촉한다. 그간의 연구를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를 보자, 까마득했던 안타까운 감정이 아버지 곁에 머무른다.


아버지 체니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아내 에바를 닮은 딸의 얼굴에서 점점 침묵하는 사랑을 발견한다. 아내와 자신이 빚어낸 로즈먼드의 손은 아픔의 상처로 퉁퉁 부어있다. 그런 딸의 손가락에 아내에게 선물했던 결혼반지를 끼워 준다. 로즈먼드는 그제야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오래전 아내의 장례식에는 많은 이들이 조문을 하러 왔었다. 그러나, 새롭게 태어난 로즈먼드의 어리숙한 몸짓에만 관심이 흘러갔고 죽은 아내를 위해 진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 곁에 머물 줄 모르는 사람들은 가식적인 애도만을 표할 뿐이었으며, 그 아무도 시미언 피즈 체니의 가슴속을 훑어보지 못했다. 아내를 그늘 속에 묻혀둘 수밖에 없던 죄책감은 축복의 대상인 딸 로즈먼드를 탓하기만을 재촉했다. 시미언은 상실을 겪은 자신의 상처가 로즈먼드에게 고스란히 남아있기만을 바랐다. 이제 자신이 죽으면 그 상처는 이제 온전히 로즈먼드의 것이 될 터. 퉁퉁 부은 딸의 손가락을 감춰 줄 결혼반지는 그간의 아픔을 더 이상 달고 살지 말기를 소망하는 아버지의 조용한 고백이다. 아내의 영성을 딸이 그대로 물려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지막 바람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시미언 피즈 체니 신부가 죽은 후, 로즈먼드는 아버지가 기보한 멜로디를 보완해 유고집을 출판한다.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만들어 가며 로즈먼드는 정원에서 조금씩 늙어 간다.




존재적 가치를 두고서 벌어진 아버지와 딸 사이의 갈등은 유고집을 완성하며 완전히 해소된다.

죽은 아내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던 딸의 존재는 부재와 상실의 의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슬픔의 원상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모습과 꼭 같아진 딸의 상처를 발견하면서 체니 신부는 사랑을 그대로 답습해 줄 딸의 온전한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남겨진 가족 그 모습 그대로를 위하는 것이, 떠나간 망자의 모습을 더욱 짙게 추억하는 방법임을 받아들인다. 딸 로즈먼드에게도 이는 같다. 어머니를 대신해 정원을 사랑하고 가꾼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체니 부부의 흔적을 고스란히 배워가게 되는 것임을 짚었을 테다. 로즈먼드의 주름살에는 정원을 사랑한 어머니와 새소리를 기보한 아버지의 시간들이 서서히 퍼져 들어간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정원에 대한 사랑을 이어받았어요. 아버지는 평생 그 일을 수행하셨고, 이제는 제가 돌봅니다. 이제는 감동도 제 몫이죠.
아버지는요, 엄마의 목소리를 이어 갔어요. 엄마의 목소리가 내리는 지시들을 어김없이 이행하셨지요. 예전에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꽃들에 대한 사랑도 그대로 답습했고요.


아내 에바의 모습을 새소리와 같은 자연물로 바라본 시선은 그윽하고 정성 어린 감상을 남긴다. 체니 신부의 기보법은 무척 남다르다. 고요한 와중에 내적으로는 그리움의 잔상이 무겁게 울려 퍼진다. 소리를 담은 이야기는 그렇다. 마치 귀에 담기는 듯한 울림은 지나침이 없이 풍요롭다. 체니 신부가 기보한 새소리는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시종일관 사제관 정원을 곁에 두고 있으며, 소리를 묘사하는 체니 신부의 감각이 글 속에 종종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딸에게 정원의 상징을 강요할 적에도 새소리의 슬픈 메아리가 얌전히 들리는 것만 같다.


음악은 이야기와 어디서나 함께 한다. 마치 시미언이 에바의 영혼과 계속해서 함께하려는 듯이. 음악은 그들 부부에게 숭고한 매개체가 되며, 삶과 죽음 사이의 이음새 역할을 한다. 정원의 모습과 소리를 기보함으로써 에바의 존재감을 표현하려는 일련의 시미언의 행동은 모두 음악에 기인하여 그리움을 승화하려는 시도다. 그렇게 시미언은 에바에 가까워지고, 삶은 죽음과 점점 마주한다. 죽은 시미언과 나이 든 로즈먼드, 그리고 희곡의 내레이터가 한 자리에 모여 소리 없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은 내면의 울림 소리만으로 추억의 대상을 지녀 보라는 아득하고 슬픈 메시지인 것만 같다.




송의경 번역가께서 직접 작가 키냐르와 문답을 나눈 적이 있다. 작가는 한국에서 해당 희곡이 초연될 경우 에바 체니와 로즈먼드 체니는 1인 2역으로 해달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딸에게서 완연한 아내의 모습을 읽어내 버리고 마는 시미언의 고통을 그제야 독자들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딸을 내쫓기까지 하는 시미언의 적막학 시선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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