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shley Oct 25. 2024

하나의 세상이 저문다는 것은

퍼펙트센스(2011), 애프터썬(2023), 혹시 저를 아세요(2024)

 무지개 다리를 건넌 햄스터를 보는 초등학교 어린 아이에게도, 나도 어느덧 이제 이 나이가 되었네, 읊조리는 50대 중년에게도 이별은 아픈 일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도 있지 않는가. 그 말 역시 누군가가 떠난 온기를 매만지던 이가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존재의 상실은 지각된 점진적인 것일까, 그저 어느 날 알지도 못한 채로 바람에 날리듯 혹은 교통사고처럼 일어나는 것일까.


 <퍼펙트 센스>의 세상은 점진적으로 예고된 상실을 다룬다. 전염병이 돌아 다섯 개의 감각이 하나씩 사라진다. 갑자기 후각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나머지 네 개의 감각으로 빈자리를 채워보지만 후각으로 불러올 수 없는 과거는 전처럼 생생하지 않다. 그래도 어찌저찌 살아간다.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자동적으로 기억이 떠오르지 않으니 악기로 그리운 향기를 추억한다. 그러다 공포와 허기가 밀려오고 미각이 사라진다. 마이클의 식당에서는 바삭한 과자가 깨지며 나는 소리로 사라진 감각들을 추억한다. 수잔은 마이클에게 어느덧 가장 큰 아픔을 털어놓고 그를 마음에 들여놓는다. 이후 청각마저 사라진다. 다른 감각들과는 다르게 전조증상인 증오와 분노로 유대관계가 해체되고, 꽤나 큰 파란이 생긴다. 폭동이 마무리된 후에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온다. 서로 눈을 가리고 길을 걸으며 앞으로 남은 단 하나의 감각을 상실할 것을 대비한다. 그 감각이 보여주는 세상에 감탄하며 서로를 찾아 안고 온기를 나눈다. 그리고 곧 암흑이 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계속해서 다른 감각이 사라지겠구나 짐작한다. 내가 누리던 것이 이토록 당연했던 세상이 사라진다. 감각은 그저 감각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를 연결해주던 통로였기에 나의 감각이 상실되는 만큼 진행되는 너의 존재의 상실을 경험한다.


 <혹시 저를 아세요>의 세상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세상이 부딪히며 일어난다. 하나의 세상에는 항상 곁에 있는 네가 있다. 그러다 예고 없이 경험한 다른 세상에는 네가 없다. 보통 반려동물이 아파보인다거나, 내가 아끼던 이와 싸운다거나 이별에는 전조증상이 있기 마련이지 않았나. 두 세상의 다른 온도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에서 당연한 부피로 차지하고 있던 네가 사라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의 것임이 분명한 물건들이 등장한다. 냉장고 자석도, 나무 수레도, 요람도 갑자기 나타나니 살짝 무섭기까지 하다. 관계의 끝에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새로운 세상의 탄생이 설명된다. 나는 너와 함께하는 세상만이 존재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는다. 우리의 세상에서 행복했지만 그곳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내가 원하던 것이 있었음을 안다. 나의 열망의 형태가 나타나 살아 숨쉬는 또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본다.


 사라짐의 형태는 <퍼펙트 센스>에서처럼 이제 조금씩 사라질거야,하며 천천히 진행되는 것일수도, <혹시 저를 아세요>에서처럼 갑자기 일어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이렇게나 궁금한 이유는 네가 사라진 이유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애프터썬>에서는 두 개의 시간선이 있다. 소피는 아빠 캘럼과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돌려본다. 우리는 어른이 된 소피와 함께 앉아 영상을 보면서 언뜻언뜻 보이는 캘럼의 위태로움을 느낀다. 그 시절의 소피가 되었다가, 어느덧 다시 성장해서 지금이 된다. 어른이 된 소피가 그 시절의 아빠를 끌어안을때 배경음악에서 누군가 외친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왜 사랑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없지? 왜 우린 사랑을 줄 수 없을까. 왜냐면 사랑은 이제 낡은 표현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고, 또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까지 바꾸게 하지.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Queen-Under Pressure

 힘들어하는 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끊임없이 아팠던 이유를 물어본다. 속상함을 느낀 채 물으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너를 찾아 끌어안고, 온기를 나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너를 느낀다. 왜 난 사랑을 줄 수 없었을까. 사랑이란 그저 그 두 단어 말에 담기는 것이 아니다. 너를 보고, 잡고, 매만진다. 최선을 다해서. 네가 나를 찾아온 이후로 일어나는 일들은 나에 대한 것도, 너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치환해서는 내가 너를 안을 때의 느낌이 설명되지 않는다. 내가 너를 매만지며 느껴지는 이 감정들이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의 세상이 저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모든 냄새와, 맛과, 소리와, 모습과, 느낌의 지평이 아득히 잠기는 것. 그러나 그 지평을 그저 바라보고 싶진않다. 그렇게 무력하게 있고 싶지 않다. 어떠한 형태로든 돌본다. 그것이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었고,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이었을 것이며, 희미한 선이 끝내 어둠에 잠긴 후에도 지속될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하늘과 바다의 지평선이 구분되지 않는 저물어가는 순간에 서있다면,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의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 모든 일은 당신을 구성하는 일이면서, 당신을 살게 해주기도 했고, 당신의 빛나는 부분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뛰어난 장점은 당신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과 무관하지 않은데, 당신은 그 일이 현재 가져오는 어려움에, 그런 특성들이 가져오는 감당하기 힘든 일에 구속되지 않을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는 당신의 힘과, 당신이 열망하는 꿈이 이뤄질 것을, 지금까지 힘든 일에 가려져 있던 당신의 생기어린 모습을 믿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 모습으로 살아갈테지만, 그것을 불러오는 시점 역시 당신이 결정할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가운 물에 익사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