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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로 Nov 03. 2017

요코하마 마라톤 2017

또 그놈의 망할 태풍 때문에.

요코하마 마라톤이 취소되었다. 그렇다. 또 그놈의 망할 태풍 때문에.


올해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지구 반대편 쿠바에서 인생 첫 허리케인을 만났다. 

허리케인이나 태풍은 동일한 자연현상이지만 ‘허리케인’이라는 이름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규모도 역대급. 전기도 끊기고 수도도 끊기고 호텔에 갇히고 

공항에서 노숙하고 비행기가 지연되고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무엇보다 보석보다도

소중한 직장인의 영혼을 모은 여름휴가는 하늘로 승천했다.


올해 개인적인 프로젝트 중에 제법 긴 프로젝트 중 하나는 '요코하마 마라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년 동안의 내 꿈 중에 하나는 풀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미를 장식할 무대가 ‘요코하마 마라톤’이었다. 무려 17000엔이나 주고 

6개월 전에 신청한 '요코하마 마라톤'은 일본의 마라톤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행사이다.

27000명이 참가하며 자원봉사자의 수까지 더하면 3만 명을 넘는다. 어쨌든 대회 전주부터 

일기예보는 심상치 않았지만 금요일은 한없이 맑았다. "그래. 딱 마치 태풍이 오기 전날."

요코하마 마라톤은 번호표를 대회 당일이 아닌 대회 전 이틀간 받을 수밖에 없다. 오전 8시에 

시작하는 마라톤이라 거리가 먼 사람은 그만큼 교통비에 숙박비까지 더해지지만 난 다행히 

친구가 살고 있다. 그럼에도 대회를 강행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대회 전날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호표를 받았다.


마지막 특식을 먹고 8시가 넘어서 요코하마 사는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대회 취소 메일을 받았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17000엔짜리 사이즈가 맞지 않는 언더아머 티셔츠만 남았다. 

‘요코하마 마라톤’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취소에 대해서는 일절 환불을 해주지 않는다. 내가 완주 후

받아야 했던 메달도 오리무중이다.


올해는 정말로 참 많은 태풍이 왔다. 굳이 태풍이 아니라도 역경은 태풍처럼 매달, 아니 매주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별개의 얘기지만 꿈에 실패했다. 사실 이제 마라톤을 완주하나 못하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나는 이제 내가 마라톤 완주쯤은 제법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골이 

없어도 달릴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어쨌든, 올해의 커다란 태풍들을 겪으면서 내가 날린 돈과 시간과 느낀 무력함과 반대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는 행복은 절대 적립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재해 앞에 인간은 무력

하다는 것이다. 바로 하루 전까지의 행복하던 내가 태풍을 만나 정신이 날아가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립되지 않는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좀 더 빨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사퇴라니"라는 생각은 처량하다.


두 번째로 느낀 점은 말 그대로 그 자연의 무력감 앞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상실감의 크기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분명 하나 조심스럽게 잠시나마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재난에 대해서 눈을 돌리지 않고 싶다. 미약하나마 조금이라도 기부하고 싶다. 

그게 전부다. 나는 태풍이 지나간 후에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지난 쿠바의 여행의 태풍이 이제는 그럴 싸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재난 일기 

정도로 기억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물론 여전히 언더아머 티셔츠만 남긴 채 통장을 스쳐간 돈이 가슴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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