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las Reau, L’Enfant Terrible 2018
벚꽃이 한 창 흐드러지게 피던 4월이었다. 날이 제법 더워지고 있었고 아침까지만 해도 서늘한 공기에 여느 때처럼 입었던 무릎 기장의 검은 가죽 자켓이 한낮엔 좀 무겁고 답답했다. 성수에서 출발한 2016번 버스를 타고 한남오거리 인근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고대하던 빅라이츠를 향해 걷고 있었다. 점심을 먹지 못한 탓에 낮술을 앞두고 편의점에서 2+1 행사를 하는 상쾌환을 사 입에 털어 넣었다. 나머지 두 개는 가방에 넣고 함께 산 바나나우유를 그 자리에서 꿀꺽거리며 다 마셨다. 이만하면 준비가 되었다. 빅라이츠 메뉴는 주로 라이트하고 디쉬 사이즈도 크지 않아 든든한 안주가 되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가볍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메뉴, 숯불로 장작 향을 더한 자연스러운 풍미의 음식들을 경험하고 싶었다. 나를 오래도록 매혹시켰던 이 공간의 매끄럽고 알싸한 우아함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빅라이츠 사장의 오랜 팬으로, 그녀가 와인바를, 치킨집을 하기 전부터 요리를 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던 그 시절부터 동경해 왔다. 팬심을 가지면 몹시 수줍어지는 타입이라 직접 그 공간에 찾아가는 일은 내게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내추럴와인에 가장 어울리는 요리와 내 취향의 공간이라는 두 가지 확실한 이유에서 마침내 빅라이츠에 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주말 오픈 시간은 2시. 빅라이츠는 주말 낮술이 가능한 와인바다. 안내 받은 둥근 원형 테이블에 하이체어가 배치된 자리에 앉았다. 실내 공간은 예상만큼 좋았다. 가구들은 프리미엄 북유럽 브랜드인 프리츠한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브랜드를 잘은 모르지만 한낮의 빅라이츠를 보니 맨 먼저 세련되고 쿨하다고 느껴졌다. 얇은 크리스탈 와인잔, 비커 모양의 물병과 군더더기 없는 한 장의 메뉴판, 모든 게 투명하게 빛나는 원형의 블랙테이블은 지나치게 말끔하고 도시적이다. 여기에 밝은 톤의 우드 체어는 자칫 날카로울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싸준다. 와인바 곳곳의 식물과 주광색 조명, 작은 액자와 그림이 그려진 종이들이 벽에 귀엽게 매달려 위트와 온기를 더해준다. 인테리어적으로 온전히 취향 저격이랄까. 세련되면서도 부드러운 공간이다. 시각적인 만족과 함께 편안하게 음식과 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 기대가 되었다. 눈 앞에 통유리 안으로 보이는 어두운 공간에선 쉐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화덕의 불꽃은 붉게 빛났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 느껴졌다. 그러다 자켓을 벗어 드러난 목덜미에 바람이 스치면 뒤 돌아 문이 열린 커다란 창 밖으로 흔들리는 하얗고 큰 얼굴의 목련들을 한참이고 보았다. 봄 햇살이 수 많은 꽃 잎사귀 위에서 반짝거렸다. 봄이었고, 나는 한낮의 술과 대화에 꽤 들떠 있었다.
‘삼촌, 내일 시간되시고, 한남동X내추럴와인 조합 괜찮으시면, 저랑 점심 어떠신가요?’ 오랜만에 삼촌과 대화하기 위한 장소로 아주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자유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 일단 삼촌께 약속시간과 빅라이츠 주소를 보냈다. 게다가 삼촌은 생경한 것을 굳이 찾아 시도해보는 타입이 아닌지라 내추럴와인이 괜찮으실지 기다리면서까지도 걱정이 된 게 사실이다. 늦는 삼촌을 대신해 먼저 와인을 시킬까도 생각했지만 누구에게나 내추럴와인의 첫 단추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삼촌을 기다렸다. 요새 라이프스타일을 다운사이징 하고 계신 삼촌은 뚜벅이로 오시느라 30분이나 늦었다.
와인 추천을 위해 말씀 드린 것은 3가지, 젖은 땅 냄새가 나고, 너무 무겁지 않아 계절과 시간대에 어울리고, 한 분은 내추럴와인이 처음입니다. 3종의 와인을 가져와 설명해 주셨고, 삼촌은 와인 결정을 전적으로 내게 맡기셨다. 예상을 훌쩍 넘는 가격에 많이 놀라면서도 정신을 붙들어 메며 취향의 와인을 골랐다. 삼촌은 몰랐지만 이번엔 반드시 삼촌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격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론은 셋 중 가장 값이 나가는 니콜라호의 앙팡 테리블로,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품종이었다. 까베르네 프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드와인 품종 중 하나다. 이 품종이 가진 젖은 땅 냄새와 맑으면서도 낮은 톤의 블랙베리류 향미가 다소 라이트하고 상큼한 레드베리류 보다 오늘의 대화 톤에 어울릴 것 같았다. 또한 너무 째미하거나 해비하지 않은 질감과 바디감이 이 계절과 시간대에 더 풍부하게 잘 살아나리라 생각했다. 선택의 또 한 가지 이유는, 깔끔한 와인 레이블과 가격에서 느껴지는 아우라였다. 그것은 누군가의 첫 내추럴와인 경험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란 확신을 내게 주었다. 삼촌처럼 컨벤셔널 와인을 즐겨 드시던 분이라면 밸런스 면에서 그 문턱이 분명히 있을 터. 금액적 부담은 있었지만 맛에 대한 확신이 더 중요했다. 물론 일상의 오아시스 같은 이런 한낮의 와인이 맛까지 좋다면 내게도 금상첨화이니 일단 즐겨보자 싶었다.
사장님이 젠틀하게 와인을 오픈 해서 따라주고 가시자마자 크게 와인잔을 돌려 냄새를 맡았다. 사실 와인을 오픈 했을 때부터 젖은 흙 냄새가 났다. 나는 흙 냄새에 대해서는 개코이기 때문에 단박에 알아챘다. 커다랗고 볼이 넓은 잔을 흔들자 그윽한 낙엽 냄새, 이끼 냄새와 함께 짙은 블랙컬러의 베리류 향이 올라왔다. 어두운 보랏빛이지만 한 모금 입에 넣으니 옅은 색처럼 입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가벼우며 맑고 신선함이 가득했다. 머금고 있던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목젖에 덜 익은 야채의 풋내와 파프리카 향이 촘촘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향신료 같기도 하고, 허브 같기도 한 오묘한 화한 향들이 혀 끝에서 조금씩 알 듯 말 듯 풍겼다. 이게 무슨 맛인가 하며 자꾸 입을 찹찹 거리니 끝에는 매니큐어 맛도 났다. 내추럴와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꼽는 이상한 맛 중 하나이자, 일부 애호가들이 꼽는 내추럴와인 맛의 매력 중 하나다. 나는 분명한 후자이기 때문에 이 향이 또 아주 반갑고 좋았다. 한 낮에 레드라니 조금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다는 삼촌도 한 모금 드시곤 가볍고 편하게 마실 수 있어서 좋다고 하셨다. 삼촌과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자유롭고 다채로운데 다소 무거울 때는 상쾌하고 가벼운 와인의 톤이 대화의 텐션을 끌어 올려주고, 라이트한 농담과 웃음이 오갈 땐 산미가 살짝 죽은 블랙커런트, 블랙베리 등의 무게감 있는 과실미가 분위기의 균형을 맞춰주었다.
니콜라호의 앙팡 테리블은 펑키하고 터프한 느낌보다는 실키하고 섬세한 느낌이 크게 와 닿았다. 까베르네 프랑 품종 자체에 기후에서 영향을 받은 서늘한 느낌과, 그로 인해 설 익은 듯 하며 풋풋하고 야생적인 느낌이 있는데 이 와인에서는 본래의 그런 특징이 거칠지 않고 무척 섬세하고 우아하게 표현되는 인상이 강했다. 균형잡힌 밸런스가 주는 품위랄까, 티 내지 않는 부티랄까. 그 당시 펑키하거나 혹은 독특한 맛을 가진 와인을 찾아 마셨던 지라 그 점이 유독 기품있게 느껴졌다.
까베르네 프랑을 까베르네 쇼비뇽과 블랜딩하여 보다 과실미 중심의 부드럽고 마시기 쉬운 와인을 만드는 보조 역할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까베르네 프랑 100% 와인은 그런 이들에게 보란 듯이 매력적이다. 나 홀로 무대에 선 근사한 테너의 공연을 보는 것 같다. 까베르네 프랑은 까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등 우리가 쉽게 접하는 레드 와인 품종들의 아버지 격이다. 이끼나 흙 내, 피망 같은 녹색채소 느낌과 체리나 라즈베리, 블랙커런트 등의 과실미가 함께 있는데 부드러운 탄닌과 적당한 산도로 마시기도 쉬우며 섬세함도 느낄 수 있다. 국내에서는 대중적인 품종으로 꼽긴 어려우나 내추럴와인 쪽에서는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니콜라호는 루아르의 앙주 지역에서 포도를 기르는데 이 지역의 토양 역시 석회암과 점토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전 편에서도 말했듯, 석회암과 점토가 섞인 땅은 토양의 수분유지와 배수에 탁월해 포도를 기르기에 적합하며 주위 양분과 향을 잘 응집시킨다. 니콜라호의 경우 독특한 방식으로 밭을 운영했는데, 2002년부터 3년간 28헥타르인 자신의 밭과 포도품종을 분석하고 실험한 뒤, 오직 7헥타르만 남겨 포도밭을 가꾼 것이다. 가장 좋은 떼루아에서 핵심부 올드 바인 5헥타르와 위급 상황에 대비한 보조용 2헥타르만을 남기고 나머지 21헥타르는 모두 자연화 했다고 한다. 가장 자연에 가까운 형태이자 완성도 높은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그의 남다른 노력을 알 수 있다.
와인을 마시다 보면 마시자마자 아! 하고 직관적으로 맛이 와 닿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 하다가도 찹찹, 무슨 맛이지? 찹찹, 알 것도 같은데? 찹찹, 아 뭐지? 하면서 계속 입 안의 와인 맛을 곱씹게 되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주로 후자를 좋아하는데 그렇게 입 안에 남은 향과 맛을 음미하다 보면 깨닫는 맛도 있지만 그 한 병을 다 마실 때까지 알지 못하는 와인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좋았다. 온전히 와인의 맛과 향에 내 감각을 쏟아 붓는 그 시간이 내겐 각별했다. 내추럴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와인과 와이너리, 와인메이커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런 시간이 단순한 각별함을 넘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내가 한낮에 이렇게 여유 있게, 먼 나라의 와인메이커의 엄청난 애정과 땀과 노력이 담긴 와인을 좋은 컨디션으로 마실 수 있다는 건 무척 사치스럽고 조금은 죄책감도 드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예의는 이 와인 한 잔 한 잔을 충분히 느끼고 감각하고 감동하며 마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뿐이겠다. 와인이 만들어지고, 내게 오기까지 애를 쓴 많은 그들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