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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Nov 30. 2022

놀라운 가메, 세바스티앙 모항 아흐칸

Sebastien morin, Arcane 2020




앞 선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가볍고 섬세한 와인을 좋아한다. 가볍고 섬세하기로 따지면 부르고뉴 가메가 빠질 수 없다. 섬세함으론 제일가는 피노누아보다 산뜻하고 덜 복잡해 마시기 쉬운 데다 타입에 따라 펑키해서 마시는 내내 캐릭터를 알아가는 일이 흥미로운 것도 있고, 어떤 웰메이드 가메는 가녀린 듯하면서도 단단한 줏대가 있어 그것을 느끼려는 과정에 매혹되는 재미도 있다. 이는 대부분 *세미탄산침용이라는 양조방식에 따른 가메의 특성인데, 덕분에 내게 가메는 와인별로 작은 변주는 있을지언정 큰 의미에서는 고정된 이미지였다. 주로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찾아 마시기도 했던 터라 그 이미지가 더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런 인식을 크게 흔들었던 가메가 있다. 단지 깔끔한 흰 라벨, 그 위에 검고 반듯한 글자로 '아흐칸'이라고 적힌, 그 놀라운 가메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한 모금 마시고 눈이 커진다. 이게 가메라고? 수입사 SNS에 들어가 해당 와인을 찾는다. 이미지를 누르고 아래 붙은 코멘트에서 분명하게 적힌 ‘gamay’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세바스티앙 모항, 아흐칸 (sebastien morin, arcane 2020)

Red/ gamay

Skin contact for 4 month, aged in plastic tank for 5 month


*스킨 컨텍이 4개월이다. 보졸레 가메인데 이렇게 오래 침용한다고? 다시 한번 놀란다. 그제야 수입사이자 와인샵인 윈비노에서 이 와인을 추천할 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병이 진해서 잘은 안 보이는데 와인 색이 검잖아요. 진해요. 가메인데 오래 침용을 해서 농축된 과실미가 풍부하고, 말씀하신 블랙베리, 라즈베리잼 그런 짙은 베리류요. 째미한 느낌도 나는 스타일이에요. 당시 나는 몇 달 전 마셨던 와인을 오래 그리워하던 참이었다. 검붉은 과실의 짙은 풍미, 높은 산미에 잼이나 처트니 같은 질감을 가진 녹진한 텍스처의 와인을 부탁했고 그 맥락에서 이 와인을 추천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가메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하면, 품종이나 여타의 정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내 컨디션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도, 언제든 많이 마시면 그 와인은 주로 가메다. 내게 술술 들어가는 술, 그런 와인을 만드는 품종이 가메인 것이다. 돼지와인으로 유명한 필립 잠봉의 가메를 마신 날도 나 홀로 병의 2/3를 넘게 마셨고(내 기준 반 병이면 완전 취향 저격의 와인이다), 셀레네를 마신 날은 거의 한 병을 비워 다음 날 몹시 고생을 한 이력도 있다. 이만큼 내 고정관념 속 보졸레 가메는 나를 취하게 하는, 몹시 사랑하는 지역의 품종인 것이다.


가메는 레드와 화이트 품종의 교배로 만들어져, 붉은빛의 레드이면서도 그 탄닌의 정도는 낮고 산도는 높은 품종이다. 풍부한 과실 향을 즐기기 좋고 가볍게 마실 수 있어, 어린 시기부터 수확하는 데다 기르기도 쉬워 과거 부르고뉴 전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하지만 14세기 말, 권력가였던 어느 공작에 의해 부르고뉴 지방에서 쫓겨나 거의 보졸레 지역에서만 길러졌다. 일반적인 포도와 와인 공식에서 벗어난 캐주얼한 스타일의 가메가 지역의 와인 명성을 떨어뜨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피노누아에 대해서는 엄청난 애호가로 가메를 뽑은 자리에 피노누아를 심도록 했다. 그 결과 피노누아는 부르고뉴의 대표 품종으로 자리매김했고, 현재에도 명실상부하게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피노누아는 키우기 몹시 까다롭고, 양조와 숙성 과정이 길고 복잡하기 때문에 당연히 맛도 보졸레 가메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때문에 보졸레가 행정구역상 분명 부르고뉴 안에 위치하지만, 보졸레와 부르고뉴 와인은 대체적으로 각기 인정된다. 오랜 시간 대부분의 보졸레 가메가 당해의 햇포도로 만든 보졸레 누보로 홍보 및 판매되어온 탓에 보졸레 누보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내추럴와인 시장에서는 그뿐 아니라 다채롭고 떼루아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릭한 가메도 많이 양조되고 있다.



왼쪽이 도멘 셀레네의 보졸레 빌라쥬후즈, 오른쪽이 필립잠봉의 트란시다. 둘 모두 쿰쿰한 향이 있어 컨츄리한 매력이 있고, 베리류 향이 풍부하며 전체적으로  맑고 부드럽다.  



다시 아흐칸으로 돌아와, 입 안의 액체를 음미해 본다.

일반적이지 않고 펑키하다는 인상이 강렬하다. 단단하게 모양 잡힌 구조가 그 인상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풍부한 자두, 머루, 블랙베리 같은 과실미와 시원한 허브향, 상큼달콤함이 농축된 쨈 같은 느낌이 충분하고, 무엇보다 산미성애자인 내게 신맛을 제대로 보여주면서도 그 산미가 도드라지지 않게 느껴지는 점이 특별하다. 묵직하고 굵은 이 와인의 뼈대가 모든 맛과 향을 매끄럽게 안아주는 인상이다. 이 가메는 마치 강렬한 탄닌이 이끄는 한 무리의 점잖은 갱같다.


탄닌은 와인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연스러운 떫은맛은 와인에 큰 매력이 된다. 레드 와인의 온도가 낮을 때 이 탄닌이 과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탄닌이 적은 과실미 위주의 화이트는 차게 칠링해서 마시면 신선함이 살고 향이 잘 발산되지만, 구조감 있는 레드는 칠링할 경우 떫은맛이 도드라져 와인이 날카롭게 느껴지게 된다. 마시는 온도를 조절해야 할 만큼 맛에 대한 탄닌의 영향력은 몹시 크다. 떫은맛은 미각이 아닌 촉각으로, 혀와 입안이 느끼는 조이는 듯한 감각이기 때문에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런 물리적 촉각에 우선 지배되면 향이나 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입안이 마르고 죄는 듯한 강렬한 감각 때문에 맛을 느끼는 혀의 감각은 둔해지고 입 안쪽으로 연결된 후각 역시 그에 밀려 향을 섬세하게 느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문가, 와인 관련 서적에서도 단단한 구조를 가진 레드와인은 주로 상온에 두었다 마시거나 마시기 전 잠깐의 칠링만을 제안한다. 하지만 아무리 음용하기 적절한 온도일지라도 와인 자체에 탄닌을 중심으로 한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어떤 와인도 맛있기 어렵다. 와인이 제 향미에 어울리는 골격을 가질 때 이 탄닌의 매력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세바스티앙 모항의 아흐칸은 독특하게도 가메의 탄닌감을 강하게 증폭시켜 만든 와인이다. 푹 익은 가메로 오래 침용하여 진하고 굵고 깊은 구조를 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하게 조이는 감각에 모든 향미가 묻히지 않는다. 신선하고 높은 산도와 풍부하고 짙은 맛과 향이 강하게 튀어 오를 수 있는 탄닌을 잡아주고 다듬어 부드럽게 조화를 이뤘다. 반대로 과할 수 있는 산미를 강한 탄닌이 잡아주고, 자칫 질릴 수 있는 익은 과실의 진한 풍미를 탄닌으로 모서리 잡아 깨끗하게 살려낸 느낌이다. 길게 적었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진하고 깊고, 무척 밸런스가 좋은 와인이라는 것.


탄닌이 강한 와인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굵고 깊은 구조는 그 안에 담긴 포도의 생명력을 오래 간직하고 다양한 맛과 향을 풍부하게 살려내며 숙성시킬 수 있다. 때문에 수입사나 샵에서 입을 모아 말하길, 2020 아흐칸이 2022년 지금도 맛있지만 더 숙성했을 때 보다 섬세하고 복잡하지만 근사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한다. 그 모습은 또 어떤 새로움을 내게 줄까? 이게 가메라고? 하며 또 얼마나 놀라게 되려나. 그저 설레는 마음이다.




보졸레인 것이 가메라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까? 품종 같은  사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포도로 만든  점잖은 갱같은 와인에 내가 매료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그런 것은 부차적일 뿐이니까. 나는 내가 아는 보졸레 가메가 아닌 새로운 보졸레 가메를  만날 것이고, 지금까지 마셔온 보졸레 가메를 부정할  다른 보졸레 가메를 만날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수많은 보졸레 가메를 만날 것이고  보졸레 가메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겠지.  모습이 어떤 모습이라도, 싱싱하고 아름답고 포도답다면 문제  것이 없다. 맛있는 내일의 가메를 위하여, 겁내지 않고 나는  앞의 잔을  것이다.





*세미탄산침용: 탄산침용은 밀폐된 발효조에 포도를 넣고 이산화탄소를 채워 산소를 빼낸 뒤 포도알 내부에서 발효가 이뤄지도록 한 것. 완전한 탄산침용은 어렵고 대부분 세미탄산침용으로 진행되는데, 세미탄산침용이은 중력에 의해 발효조 아래 포도들이 자연스럽게 터지기 때문에 위의 일부는 포도알 내부 발효를, 아래는 포도 껍질에 붙은 자연효모에 의한 발효가 함께 진행된다. 발효 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탄산이 포도의 산화를 막아 이산화황 등의 인위적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과즙이 껍질과의 접촉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색이 투명하고 순수한 과실 맛이 나며, 탄닌이 순하다.


*스킨컨텍: 포도즙이 껍질을 함께 있는 것을 말하며, 이때 껍질에 있는 색과 타닌이 포도즙에 스며든다. 와인의 생명력이나 컨셉에 따라 짧게는 몇 시간부터 길게는 몇 달까지 그 시간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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