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린남 Nov 07. 2022

내 머리맡 따뜻한 궁둥이

에린남의 취향탐구생활

키우는 개를 길에 버렸다거나, 학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어떻게 개를 괴롭힐 수 있지? 분명 그 인간은 개의 작은 심장 소리를 제대로 들어 본 적 없는 게 분명해!


2017년에 태어나 만 다섯 살이 된 구르미는, 남동생 집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온 개다. 구르미가 우리 집에 온 날부터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일찍 기상하고 있다. 구르미는 야외가 아니면 배변을 하지 않는다. 쉬가 마려워도 밖에 나가기 전까지 참고 참는다. 동생이 아침 일곱 시에 산책시킨 습관이 있어, 나도 그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뜨면, 구르미는 이미 일어나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안 일어나냐고, 쉬 마려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시간을 기억하고 참는 것이다. 배변 패드를 깔아 둬도 쓰는 법이 없다. 구르미의 건강한 배변 습관과 즐거운 일상을 위해 나는 할 수 없이 하루 두 번 꼬박꼬박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주말만큼은 늘어지게 자고 싶었는데, 구르미는 내 수면욕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매일 아침 당당히 산책을 요구했다. 프리랜서의 가장 좋은 점은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그 자유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덕분에 아침부터 업무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프리랜서가 됐다.


산책할 때마다 여러 강아지를 만난다. 개들이 서로 냄새를 맡거나 탐색하는 동안 견주들도 대화를 나눈다. 처음에는 스몰 토크가 쉽지만은 않았다. 낯을 가리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몰라 어색했다. 지금은 익숙하다. 견주들은 서로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대화하곤 하는데, 보통 개의 나이나 이름을 묻는다. 그 정도 이야기를 하면 어느새 개들은 서로 인사를 끝내고 주인에게 가자고 재촉한다. 그래서 견주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떠오르는 말을 바로 뱉어야 한다. 개가 귀여우면 귀엽다고, 예쁘면 예쁘다고 빠르게 칭찬한다(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개이기 때문에 사실 만나는 모든 개가 귀엽고 예쁘다). 


원래 무슨 말이든 신중히 하려는 나지만, 개와 산책하는 동안에는 예외다. 산책을 통해 초보 견주는 몰랐던 사실도 배운다. 구르미와 산책할 때 자주 듣는 말이 하나 있다. ‘날씬해서 좋겠다’는 말이다. 주로 어르신들이 이 말을 건넨다. 구르미는 입이 짧은 개라 항상 사료를 남기는데 나는 이 점이 늘 걱정되던 차였다. 어느 날에는 너무 궁금해서 말을 건넨 할머니께 개가 날씬하면 왜 좋은지 여쭤봤다. 열다섯 살이 넘은 개를 산책시키던 할머니는, “살찌면 개도 다리가 아프니까요”라고 하셨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할머니는 매일 개의 다리를 마사지해 준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말끝에 사랑이 잔뜩 묻어났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일찍 일어나 산책하는 일이 귀찮았다. 구르미의 기대에 찬 눈을 보며 꾹 참고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구르미와 산책을 하는 게 더 이상 귀찮지 않았다.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 가고, 허기지면 밥을 먹는 것처럼 아침에 구르미와 산책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 됐다. 익숙해진 건 구르미도 마찬가지다. 구르미는 이제 아침마다 내 얼굴만 내려다보며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서 방을 한 바퀴 돌고는 침대로 돌아와 20분 정도 더 잔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니 함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내가 일어나 화장실을 가도 눈으로만 움직임을 좇을 뿐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완벽하게 적응한 모양새다.




구르미가 아무런 경계 없이 편하게 누워 있을 때, 산책하다가 큰 소리에 놀라 내 곁으로 바싹 붙을 때, 딸꾹질을 하고는 내게 달려와 어떻게 해 보라는 얼굴을 할 때마다 나는 이 개에게 신뢰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 믿음을 깨뜨릴 수 없어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이고, 가만히 안아 주고, 등을 쓸어준다.


어느 나른한 오후, 낮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구르미가 부리나케 침대에 따라 올라왔다. 그러고는 내 베개 위쪽에 동그랗게 자리 잡았다. 내 머리맡에 따뜻한 궁둥이가 있다. 내 우주에 이 궁둥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새겨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허술하고 빈약해도 충분한 내 홈 카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