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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Feb 20. 2023

모든 걸 포기한 뒤에 하게 된 일

내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서른두 살의 어느 날, 나는 꿈을 포기하기로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이 나와 잘 맞지 않았고 딱히 재밌지 않았으며 큰 재능도 없었다. 이 밖에 도 이유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더 말했다가는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팩트 폭행에 슬퍼질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꿈을 포기하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이 꿈을 내려둘 좋은 기회 같았다. 이루기 전에 그만두는 편이 내게는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포기를 기회라 여기며 긴 시간 함께했던 꿈을 정리했다. 대신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꿈 때문에 내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한 다른 가능성을 살폈다. 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떠올리기로 했다.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으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는 다짐이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나에게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하루가 멀다시피 앉아 있던 책상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흘려보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재밌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집안일을 하고 남편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 마음이 건네는 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으면 말만 하라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한동안 무언가 하고픈 의욕이 한 방울도 생기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드디어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모든 걸 내려둔 뒤에 가장 먼저 하고파진 일. 다름 아닌 글쓰기였다. 글이라니! 글쓰기라면 매일 해오던 일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만드느라 글을 썼고, 보고 듣고 느낀 걸 잊지 않으려고 글을 썼으며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려 글을 썼다. 내게 글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익숙하게 여겼던 일이 낯선 얼굴을 하고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그 친근한 방문객이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글을 쓰기로 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곧바로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노트북을 열어 새로운 문서를 만들었다.


딱히 쓰고 싶은 게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당시 머물고 있던 호주살이에 관해 썼다.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썼다. 며칠이 지나자 큰 부담감이나 욕심 없이 쓴 글이 모였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그 글들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일순간 들었다. 1년 만에 브런치에 접속해서 쓴 글을 올리려는데 글만 덩그러니 있는 게 허전해 보였다. 섬네일로 쓸 만한 사진이 필요했다. 마땅한 사진을 찾으려고 하니 또 귀찮았다. 그때 마침 떠오른 생각 하나. 글에 맞는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


바로 여기서부터 상황이 재밌게 흘러갔다. 그림 그리기는 내가 그만두기로 결심한 목록에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해온 그림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서 다시는 그리지 않기로 했는데, 어느덧 뻔뻔한 얼굴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꽤 재밌게 그렸다. 목표나 꿈을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나는 즐거웠다. 그래서 계속 한 편씩 쓰고 그렸다.


게다가 지금은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것을 만들고 있다. 내가 그린 그림이 영상이 되었고, 심지어 많은 사람이 봐줬다. 꿈을 포기했지만 이룬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다. 이정도면 꿈이라는 이름이 주던 무게감만 내려둔 것은 아닐까.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두고, 나는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처음엔 그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나의 폭이 협소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짧은 순간에 번뜩이듯 낯설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배운 적 없고, 평소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일이 자연스레 떠오를 리 만무했다. 어쩌면 나도 은연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꿈을 편히 내려두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다행이다. 좋아하는 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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