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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Feb 20. 2023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짐 비우기

내가 잘 지내면 좋겠어요

우리 집에서 역할을 잃은 2단 서랍장을 중고 마켓에 올렸다. 올리기만 하면 금세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게 될 줄 알았는데 영 인기가 없었다. 하루빨리 서랍장을 떠나보내고 싶던 나는 괜히 거실 한편에 나와 있는 서랍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싸움을 했다.


생각처럼 팔리지 않는 서랍장을 볼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공간을 그리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에서 내보내니 몸집보다 세 배는 큰 짐처럼 느껴졌다.집이 더 좁아 보이고 그만큼 마음도 무거워졌다. 


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주방 옆 작은 창고에 넣어두었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니 더 이상 불편한 마음도 생기지 않을 줄알았건만, 그 서랍의 존재감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또렷하기만했다. 일주일쯤 지나서 가격을 내렸다. 그제야 서랍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생겼다. 그 다음 날 오후에 창고에 있던 서랍장은 우리 집을 떠나갔다. 공간이 비워졌다는 사실보다 내 마음이 가벼워져서 기뻤다.


그러나 나에겐 해결하지 못한 짐이 남아 있었다. 여행용 캐리어 안에는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잠들어 있었다. 그 드레스는 호주에 있는 드레스 숍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어깨가 드러나고 허리는 바짝 조이며 골반에서 바닥까지 일자로 떨어져서 내 체형을 보완하기 적절한 디자인이었다. 가격도 한 번 빌려 입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었다.


내 웨딩드레스는 결혼식 때 딱 한 번 입은 뒤에 두 번이나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다시 호주로 갈 때 한 번, 호주에서 한국으로 이사 올 때 한 번. 그렇게 장거리 이동을 했지만, 제대로 된 활약은 한 번뿐이었다. 그 뒤로는 비닐 커버에 들어간 채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누군가는 훗날 딸에게 물려주면 감동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게 그런 로망은 없었다. 만약 딸이 있다고 하더라도 딸이 결혼할 즈음인 몇십 년 뒤에는 내 웨딩드레스보다 훨씬 더 예쁘고 좋은 드레스가 많을 테고, 나와 똑 닮은 딸이라면 분명 엄마가 준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드레스를 골라 입을 것이다. 그때까지 웨딩드레스를 보관할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오히려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을 때 입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잠깐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거추장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게 된다고 해도, 흰 셔츠에 흰 바지를 입고 싶었다. 남편도 나와 똑같이 입히고 머리에 짧은 면사포를 쓴 채 작은 꽃다발을 들면 충분할 것 같았다. 담백한 차림의 사진이 남는다면,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에도 마음에 드는 웨딩 사진이 되지 않을까?아무리 생각해도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남편은 웨딩드레스를 보며 고민하는 나를 보고 거들었다.


“가지고 있으면 뭐 해.”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어 중고 마켓에 구매한 가격의 10분의 1로 올렸다. 아무 소식 없이 일주일이 흐르고 나서야 알림이 울렸다. 웨딩드레스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바로 그날 저녁에 구매하러 오겠다고 했다. 갑자기 한쪽에 걸려 있던 웨딩드레스가 예뻐 보인 것은 그릇된 욕심이었다.


그날 저녁, 구매자를 만나 거래를 했다. 돈을 받고 파는건데도 구매자는 내게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다 대뜸 나에게 웨딩드레스 활용 계획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촬영할 때 입고,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조카에게 선물할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선물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내게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웨딩드레스에게 두 번의 기회를 더 주기 위해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웨딩드레스는 무슨 복을 타고난 걸까. 호주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간다. 그다음 목적지도 있을까?


나의 웨딩드레스는 적당한 때에 좋은 사람을 만나 몇 명의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불편한 마음만 갖게 하던 물건이 누군가에게로 가서 제 몫을 해낸다. 개운한 마음이 남았다. 이런 날은 유난히 잠이 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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